“나는 광주의 계엄군이었습니다”…“용서합니다”
입력 2022.05.18 (21:01)
수정 2022.05.1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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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광주의 계엄군이었습니다"
오늘(18일) 9시 뉴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42년 전 오늘, 비극의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입니다.
kbs는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이 두 사람을 만나 '그 날' '그 일'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소식, 김성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광주 출신의 25살 청년 김귀삼 씨는 3공수부대 소속으로 고향에 투입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그 곳...
그러나, 고향 땅은 이미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돌아가신 분들 시신도 이렇게 쭉 봤었는데 참혹했죠. 이게 전쟁터도 아닌데."]
'그 일'을... 김 씨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향의 이웃들은 시민군, 즉 '진압할' 대상이 됐고, 그 속에, 형과 동생까지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먼저 쓰러뜨려야 내가 산다는 생각으로 폭력이 오갔기 때문에 내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 확인을 하느라고 그쪽으로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아는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가슴 졸였던 날들...
그러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고 김 씨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너가 고향 사람을 죽이러 왔다' 이렇게 증오 아닌 증오를 받게 되고 고향을 이렇게 떠나고 그런 게 어떻게 보면 아프지."]
또다른 계엄군 김모 씨는 42년 전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에 투입됐습니다.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그 현장.
김 씨가 바로, 목격자였습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바로 첫 도랑에서부터 쭉 (매장) 해왔으니깐. (시신) 7구 정도는 묻혔던 거로 알아요."]
지금도 주위에서 큰 소리만 나면 그날의 '총소리'로 들린다는 김 씨...
[김○○/계엄군 중사 출신 :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우리 엎드려있는 상황에서 다들 (시민군을) 쏴버린 거야."]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다는 옛 군인들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폭력을 했다라는 것도 인정하죠. 그중에 저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에게 참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렇게 얘기를 꼭 드리고 싶고..."]
KBS 뉴스 김성숩니다.
[앵커]
두려움을 무릅쓰고 카메라 앞에 선 두 계엄군의 고백과 사죄에 유족들은 흔쾌히 용서를 말했습니다.
정작 사죄하고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다며, 이들의 증언으로 그날의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윤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1일, 일 보고 오겠다고 외출했던 남편은, 엿새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남편) 시체를 여기다 갖다 놓았더라고. 그러니 어쩌겠어. 우리 어린 것들은 아무것들도 모르고..."]
그 날로부터 42년...
가해자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지만 최정희 씨는 오늘에서야 두 계엄군의 사죄를 접했습니다.
단죄할 대상은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과 신군부라며, 망설임 없이 그녀는, 용서를 말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 그러니까 용서를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일부러 개인이 한 게 아니라 시켜서 한 것이니까. 전두환은 용서 못 해요. 죽을 때도 그렇잖아요."]
42년을 이어져온 고통의 뿌리로, 계엄군들도, 전두환을 비롯한 명령권자들을 지목합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명령 불복종..."]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부하들은 불구자된 사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의 도의적 책임 아닌가."]
광주에 투입됐던 젊은 군인들은 이제 대부분 60대가 됐습니다.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신군부 책임자들과 달리, 이들은, 증언도, 참회의 말도, 누구보다 생생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동원됐던 계엄군 2만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유의미한 진술을 남긴 경우는 1퍼센트 정도.
대부분이 혼자만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 속으로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송선태/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지난 12일 대국민 보고회 :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아직도 '5월 광주'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묻혀있습니다.
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최정희 씨가 계엄군들을 용서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군인들이 사과도 하고.. 다 용서해줘도 되겠지? 그치?"]
KBS 뉴스 이윤웁니다.
촬영기자:윤재구 민창호 송혜성/영상편집:차정남 서정혁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광주의 계엄군이었습니다"
오늘(18일) 9시 뉴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42년 전 오늘, 비극의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입니다.
kbs는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이 두 사람을 만나 '그 날' '그 일'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소식, 김성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광주 출신의 25살 청년 김귀삼 씨는 3공수부대 소속으로 고향에 투입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그 곳...
그러나, 고향 땅은 이미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돌아가신 분들 시신도 이렇게 쭉 봤었는데 참혹했죠. 이게 전쟁터도 아닌데."]
'그 일'을... 김 씨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향의 이웃들은 시민군, 즉 '진압할' 대상이 됐고, 그 속에, 형과 동생까지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먼저 쓰러뜨려야 내가 산다는 생각으로 폭력이 오갔기 때문에 내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 확인을 하느라고 그쪽으로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아는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가슴 졸였던 날들...
그러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고 김 씨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너가 고향 사람을 죽이러 왔다' 이렇게 증오 아닌 증오를 받게 되고 고향을 이렇게 떠나고 그런 게 어떻게 보면 아프지."]
또다른 계엄군 김모 씨는 42년 전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에 투입됐습니다.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그 현장.
김 씨가 바로, 목격자였습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바로 첫 도랑에서부터 쭉 (매장) 해왔으니깐. (시신) 7구 정도는 묻혔던 거로 알아요."]
지금도 주위에서 큰 소리만 나면 그날의 '총소리'로 들린다는 김 씨...
[김○○/계엄군 중사 출신 :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우리 엎드려있는 상황에서 다들 (시민군을) 쏴버린 거야."]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다는 옛 군인들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폭력을 했다라는 것도 인정하죠. 그중에 저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에게 참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렇게 얘기를 꼭 드리고 싶고..."]
KBS 뉴스 김성숩니다.
[앵커]
두려움을 무릅쓰고 카메라 앞에 선 두 계엄군의 고백과 사죄에 유족들은 흔쾌히 용서를 말했습니다.
정작 사죄하고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다며, 이들의 증언으로 그날의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윤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1일, 일 보고 오겠다고 외출했던 남편은, 엿새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남편) 시체를 여기다 갖다 놓았더라고. 그러니 어쩌겠어. 우리 어린 것들은 아무것들도 모르고..."]
그 날로부터 42년...
가해자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지만 최정희 씨는 오늘에서야 두 계엄군의 사죄를 접했습니다.
단죄할 대상은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과 신군부라며, 망설임 없이 그녀는, 용서를 말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 그러니까 용서를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일부러 개인이 한 게 아니라 시켜서 한 것이니까. 전두환은 용서 못 해요. 죽을 때도 그렇잖아요."]
42년을 이어져온 고통의 뿌리로, 계엄군들도, 전두환을 비롯한 명령권자들을 지목합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명령 불복종..."]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부하들은 불구자된 사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의 도의적 책임 아닌가."]
광주에 투입됐던 젊은 군인들은 이제 대부분 60대가 됐습니다.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신군부 책임자들과 달리, 이들은, 증언도, 참회의 말도, 누구보다 생생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동원됐던 계엄군 2만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유의미한 진술을 남긴 경우는 1퍼센트 정도.
대부분이 혼자만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 속으로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송선태/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지난 12일 대국민 보고회 :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아직도 '5월 광주'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묻혀있습니다.
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최정희 씨가 계엄군들을 용서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군인들이 사과도 하고.. 다 용서해줘도 되겠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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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기자:윤재구 민창호 송혜성/영상편집:차정남 서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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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2-05-18 2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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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주의 계엄군이었습니다"
오늘(18일) 9시 뉴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42년 전 오늘, 비극의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입니다.
kbs는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이 두 사람을 만나 '그 날' '그 일'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소식, 김성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광주 출신의 25살 청년 김귀삼 씨는 3공수부대 소속으로 고향에 투입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그 곳...
그러나, 고향 땅은 이미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돌아가신 분들 시신도 이렇게 쭉 봤었는데 참혹했죠. 이게 전쟁터도 아닌데."]
'그 일'을... 김 씨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향의 이웃들은 시민군, 즉 '진압할' 대상이 됐고, 그 속에, 형과 동생까지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먼저 쓰러뜨려야 내가 산다는 생각으로 폭력이 오갔기 때문에 내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 확인을 하느라고 그쪽으로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아는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가슴 졸였던 날들...
그러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고 김 씨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너가 고향 사람을 죽이러 왔다' 이렇게 증오 아닌 증오를 받게 되고 고향을 이렇게 떠나고 그런 게 어떻게 보면 아프지."]
또다른 계엄군 김모 씨는 42년 전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에 투입됐습니다.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그 현장.
김 씨가 바로, 목격자였습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바로 첫 도랑에서부터 쭉 (매장) 해왔으니깐. (시신) 7구 정도는 묻혔던 거로 알아요."]
지금도 주위에서 큰 소리만 나면 그날의 '총소리'로 들린다는 김 씨...
[김○○/계엄군 중사 출신 :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우리 엎드려있는 상황에서 다들 (시민군을) 쏴버린 거야."]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다는 옛 군인들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폭력을 했다라는 것도 인정하죠. 그중에 저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에게 참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렇게 얘기를 꼭 드리고 싶고..."]
KBS 뉴스 김성숩니다.
[앵커]
두려움을 무릅쓰고 카메라 앞에 선 두 계엄군의 고백과 사죄에 유족들은 흔쾌히 용서를 말했습니다.
정작 사죄하고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다며, 이들의 증언으로 그날의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윤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1일, 일 보고 오겠다고 외출했던 남편은, 엿새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남편) 시체를 여기다 갖다 놓았더라고. 그러니 어쩌겠어. 우리 어린 것들은 아무것들도 모르고..."]
그 날로부터 42년...
가해자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지만 최정희 씨는 오늘에서야 두 계엄군의 사죄를 접했습니다.
단죄할 대상은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과 신군부라며, 망설임 없이 그녀는, 용서를 말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 그러니까 용서를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일부러 개인이 한 게 아니라 시켜서 한 것이니까. 전두환은 용서 못 해요. 죽을 때도 그렇잖아요."]
42년을 이어져온 고통의 뿌리로, 계엄군들도, 전두환을 비롯한 명령권자들을 지목합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명령 불복종..."]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부하들은 불구자된 사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의 도의적 책임 아닌가."]
광주에 투입됐던 젊은 군인들은 이제 대부분 60대가 됐습니다.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신군부 책임자들과 달리, 이들은, 증언도, 참회의 말도, 누구보다 생생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동원됐던 계엄군 2만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유의미한 진술을 남긴 경우는 1퍼센트 정도.
대부분이 혼자만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 속으로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송선태/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지난 12일 대국민 보고회 :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아직도 '5월 광주'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묻혀있습니다.
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최정희 씨가 계엄군들을 용서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군인들이 사과도 하고.. 다 용서해줘도 되겠지? 그치?"]
KBS 뉴스 이윤웁니다.
촬영기자:윤재구 민창호 송혜성/영상편집:차정남 서정혁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광주의 계엄군이었습니다"
오늘(18일) 9시 뉴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42년 전 오늘, 비극의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입니다.
kbs는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이 두 사람을 만나 '그 날' '그 일'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소식, 김성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광주 출신의 25살 청년 김귀삼 씨는 3공수부대 소속으로 고향에 투입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그 곳...
그러나, 고향 땅은 이미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돌아가신 분들 시신도 이렇게 쭉 봤었는데 참혹했죠. 이게 전쟁터도 아닌데."]
'그 일'을... 김 씨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향의 이웃들은 시민군, 즉 '진압할' 대상이 됐고, 그 속에, 형과 동생까지 있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먼저 쓰러뜨려야 내가 산다는 생각으로 폭력이 오갔기 때문에 내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 확인을 하느라고 그쪽으로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아는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가슴 졸였던 날들...
그러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고 김 씨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너가 고향 사람을 죽이러 왔다' 이렇게 증오 아닌 증오를 받게 되고 고향을 이렇게 떠나고 그런 게 어떻게 보면 아프지."]
또다른 계엄군 김모 씨는 42년 전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에 투입됐습니다.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그 현장.
김 씨가 바로, 목격자였습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바로 첫 도랑에서부터 쭉 (매장) 해왔으니깐. (시신) 7구 정도는 묻혔던 거로 알아요."]
지금도 주위에서 큰 소리만 나면 그날의 '총소리'로 들린다는 김 씨...
[김○○/계엄군 중사 출신 :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우리 엎드려있는 상황에서 다들 (시민군을) 쏴버린 거야."]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다는 옛 군인들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폭력을 했다라는 것도 인정하죠. 그중에 저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에게 참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렇게 얘기를 꼭 드리고 싶고..."]
KBS 뉴스 김성숩니다.
[앵커]
두려움을 무릅쓰고 카메라 앞에 선 두 계엄군의 고백과 사죄에 유족들은 흔쾌히 용서를 말했습니다.
정작 사죄하고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다며, 이들의 증언으로 그날의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윤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1일, 일 보고 오겠다고 외출했던 남편은, 엿새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남편) 시체를 여기다 갖다 놓았더라고. 그러니 어쩌겠어. 우리 어린 것들은 아무것들도 모르고..."]
그 날로부터 42년...
가해자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지만 최정희 씨는 오늘에서야 두 계엄군의 사죄를 접했습니다.
단죄할 대상은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과 신군부라며, 망설임 없이 그녀는, 용서를 말했습니다.
[최정희/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 그러니까 용서를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일부러 개인이 한 게 아니라 시켜서 한 것이니까. 전두환은 용서 못 해요. 죽을 때도 그렇잖아요."]
42년을 이어져온 고통의 뿌리로, 계엄군들도, 전두환을 비롯한 명령권자들을 지목합니다.
[김○○/계엄군 중사 출신 :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명령 불복종..."]
[김귀삼/계엄군 중사 출신 : "부하들은 불구자된 사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의 도의적 책임 아닌가."]
광주에 투입됐던 젊은 군인들은 이제 대부분 60대가 됐습니다.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신군부 책임자들과 달리, 이들은, 증언도, 참회의 말도, 누구보다 생생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동원됐던 계엄군 2만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유의미한 진술을 남긴 경우는 1퍼센트 정도.
대부분이 혼자만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 속으로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송선태/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지난 12일 대국민 보고회 :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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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최정희 씨가 계엄군들을 용서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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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우 기자 yw@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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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기자 ssoo@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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