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저는 속초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국회의원입니다
입력 2020.03.0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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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2016년 2월 28일, 20대 총선을 한 달 반 앞두고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공개됐습니다.
그때도 선거구 변동, 이로 인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반발이 잇따랐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대 국회에는 없었던, 5개 시·군이 묶인 '대형 선거구'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4.15 총선을 43일 앞둔 어제(3일), 21대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6개 시·군이 묶인 '초' 대형 선거구가 등장했습니다.
이 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실제 이 선거구가 적용된다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앞으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야 합니다.
"저는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국회의원입니다."
수원은 5명…·속초-고성은 다~합쳐 1명
슈퍼 선거구를 넘어 '메가' 선거구로 불리는 이 지역. 서울 전체 면적의 8배가 넘습니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강원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휴전선 인접 지역을 모두 묶었는데, 양 끝에 위치한 속초시청에서 철원군청까지는 쉬지 않고 차를 달려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구는 기본적으로 인구(정확히는 총선 기준 15개월 전 인구)를 기준으로 획정하는데, 강원도는 면적은 넓고, 인구는 적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경기도 수원은 갑·을·병·정·무 5개의 선거구가 있고, 국회의원도 5명입니다. 하지만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은 6개 시군이 하나의 선거구, 국회의원도 1명입니다.
언뜻 보면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선거구 획정 기준이 되는 인구를 따져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는 6개 시군을 모두 합쳐도 23만 6천 명 가량(19년 1월 기준)입니다. 반면, 수원은 '구' 하나가 37만 명(권선구)이 넘습니다.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이번에 획정 기준으로 삼은 '인구 편차 허용범위'는 13만 6천5백여 명 이상, 27만 3천백여 명 이하입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도 정확히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28만 명가량의 춘천은 갑을 2개 선거구로 분구됐는데, 강원도 의원 정수는 변동 없이 현행 8명으로 고정됐고, 결국 춘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압축'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인구는 더 늘고, 농산어촌 인구는 더 줄어들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6개 시군 선거구지만 7개, 8개 지역이 묶인 선거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도농 격차가 벌어지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쏠림 현상이 생긴다면, 지역 양극화가 더 심화할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행 선거법에는 선거구 획정의 기준으로 인구를 두는 것 외에도,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구'만'이 기준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획정안을 두고,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법 규정을 역행했다"고 반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시작은 1년 3개월 전, 21대 총선을 위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출범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국회는 선거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획정위는 그보다 한 달 전까지 획정안을 마련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선거법에 규정돼있습니다. 다만, 법을 안 지키는 것뿐입니다.
2018년 12월에 출범한 획정위는 도대체 왜 법 규정까지 어겨가며 13개월 전이 아닌 선거 43일 전에야 획정안을 마련한 걸까요?
획정위는 출범 한 달 뒤, 국회에 지역구 정수를 확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치권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21대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253명으로 한다는 선거법은 지난해 12월에야 겨우 통과됐습니다. 획정위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숫자가 정해지기 전에는 획정 작업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선거법이 통과되고도 두 달이 넘도록, 국회는 획정위가 요구하는 시도별 정수 등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획정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국회가 제시하는 기준 없이, 획정 작업을 시작해 결과물을 내놨습니다.
기준을 보내주지 않아서 선거구 획정을 못 했다는 '독립 기구' 획정위,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의를 미루다 막판까지도 여야 합의에 실패한 국회. 어느 쪽이 더 문제라고 보십니까?
하루 만에 "다시 짜와라"…피해는 유권자
어느 지역에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고 줄일지 정하는, '시도별 정수'처럼 민감한 기준을 마련할 땐 번번이 엇갈렸던 여야가 선거구획정위가 마련한 획정안에 대해선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현행 선거법의 취지를, 획정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으니, 획정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이 외에도 앞서 여야가 (추상적으로) 합의했던 '선거구 최소 조정'과 '구역조정의 최소화'도 획정위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반발했습니다.
결국 국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가 오늘(4일) 획정위에 선거구 획정안을 다시 제출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획정안이 제출된 지 하루 만입니다.
선거법상 국회는 딱 한 번에 한해, 그 이유를 달아 획정위에 재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애초 예정됐던 내일(5일) 본회의에 선거구 획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습니다.
만약 5일에 통과되더라도 이번 선거구 획정은 역대 두 번째로 늦은 국회 통과로 기록됩니다. 안 좋은 기록을 늘 경신하는 우리 정치권이 이번에는 또 어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우게 될지요.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 듯합니다.
그때도 선거구 변동, 이로 인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반발이 잇따랐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대 국회에는 없었던, 5개 시·군이 묶인 '대형 선거구'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2016년 20대 총선 강원도 국회의원 선거구
4.15 총선을 43일 앞둔 어제(3일), 21대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6개 시·군이 묶인 '초' 대형 선거구가 등장했습니다.
이 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실제 이 선거구가 적용된다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앞으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야 합니다.
"저는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국회의원입니다."
수원은 5명…·속초-고성은 다~합쳐 1명
슈퍼 선거구를 넘어 '메가' 선거구로 불리는 이 지역. 서울 전체 면적의 8배가 넘습니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강원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휴전선 인접 지역을 모두 묶었는데, 양 끝에 위치한 속초시청에서 철원군청까지는 쉬지 않고 차를 달려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선거구 획정안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구는 기본적으로 인구(정확히는 총선 기준 15개월 전 인구)를 기준으로 획정하는데, 강원도는 면적은 넓고, 인구는 적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경기도 수원은 갑·을·병·정·무 5개의 선거구가 있고, 국회의원도 5명입니다. 하지만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은 6개 시군이 하나의 선거구, 국회의원도 1명입니다.
언뜻 보면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선거구 획정 기준이 되는 인구를 따져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는 6개 시군을 모두 합쳐도 23만 6천 명 가량(19년 1월 기준)입니다. 반면, 수원은 '구' 하나가 37만 명(권선구)이 넘습니다.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이번에 획정 기준으로 삼은 '인구 편차 허용범위'는 13만 6천5백여 명 이상, 27만 3천백여 명 이하입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도 정확히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28만 명가량의 춘천은 갑을 2개 선거구로 분구됐는데, 강원도 의원 정수는 변동 없이 현행 8명으로 고정됐고, 결국 춘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압축'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인구는 더 늘고, 농산어촌 인구는 더 줄어들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6개 시군 선거구지만 7개, 8개 지역이 묶인 선거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도농 격차가 벌어지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쏠림 현상이 생긴다면, 지역 양극화가 더 심화할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행 선거법에는 선거구 획정의 기준으로 인구를 두는 것 외에도,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구'만'이 기준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획정안을 두고,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법 규정을 역행했다"고 반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시작은 1년 3개월 전, 21대 총선을 위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출범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국회는 선거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획정위는 그보다 한 달 전까지 획정안을 마련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선거법에 규정돼있습니다. 다만, 법을 안 지키는 것뿐입니다.
2018년 12월에 출범한 획정위는 도대체 왜 법 규정까지 어겨가며 13개월 전이 아닌 선거 43일 전에야 획정안을 마련한 걸까요?
3일 국회의장에게 획정안을 제출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김세환 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장
획정위는 출범 한 달 뒤, 국회에 지역구 정수를 확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치권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21대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253명으로 한다는 선거법은 지난해 12월에야 겨우 통과됐습니다. 획정위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숫자가 정해지기 전에는 획정 작업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선거법이 통과되고도 두 달이 넘도록, 국회는 획정위가 요구하는 시도별 정수 등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획정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국회가 제시하는 기준 없이, 획정 작업을 시작해 결과물을 내놨습니다.
여야 원내대표가 2일 선거구 획정 기준을 협의하기 위한 회동을 하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기준을 보내주지 않아서 선거구 획정을 못 했다는 '독립 기구' 획정위,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의를 미루다 막판까지도 여야 합의에 실패한 국회. 어느 쪽이 더 문제라고 보십니까?
하루 만에 "다시 짜와라"…피해는 유권자
어느 지역에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고 줄일지 정하는, '시도별 정수'처럼 민감한 기준을 마련할 땐 번번이 엇갈렸던 여야가 선거구획정위가 마련한 획정안에 대해선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여야 3당 원내대표가 4일 선거구 획정안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동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현행 선거법의 취지를, 획정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으니, 획정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이 외에도 앞서 여야가 (추상적으로) 합의했던 '선거구 최소 조정'과 '구역조정의 최소화'도 획정위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반발했습니다.
결국 국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가 오늘(4일) 획정위에 선거구 획정안을 다시 제출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획정안이 제출된 지 하루 만입니다.
김세환 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장이 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선거법상 국회는 딱 한 번에 한해, 그 이유를 달아 획정위에 재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애초 예정됐던 내일(5일) 본회의에 선거구 획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습니다.
만약 5일에 통과되더라도 이번 선거구 획정은 역대 두 번째로 늦은 국회 통과로 기록됩니다. 안 좋은 기록을 늘 경신하는 우리 정치권이 이번에는 또 어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우게 될지요.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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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심야심] 저는 속초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국회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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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0-03-04 18:44:21
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2016년 2월 28일, 20대 총선을 한 달 반 앞두고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공개됐습니다.
그때도 선거구 변동, 이로 인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반발이 잇따랐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대 국회에는 없었던, 5개 시·군이 묶인 '대형 선거구'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4.15 총선을 43일 앞둔 어제(3일), 21대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6개 시·군이 묶인 '초' 대형 선거구가 등장했습니다.
이 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실제 이 선거구가 적용된다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앞으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야 합니다.
"저는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국회의원입니다."
수원은 5명…·속초-고성은 다~합쳐 1명
슈퍼 선거구를 넘어 '메가' 선거구로 불리는 이 지역. 서울 전체 면적의 8배가 넘습니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강원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휴전선 인접 지역을 모두 묶었는데, 양 끝에 위치한 속초시청에서 철원군청까지는 쉬지 않고 차를 달려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구는 기본적으로 인구(정확히는 총선 기준 15개월 전 인구)를 기준으로 획정하는데, 강원도는 면적은 넓고, 인구는 적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경기도 수원은 갑·을·병·정·무 5개의 선거구가 있고, 국회의원도 5명입니다. 하지만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은 6개 시군이 하나의 선거구, 국회의원도 1명입니다.
언뜻 보면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선거구 획정 기준이 되는 인구를 따져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는 6개 시군을 모두 합쳐도 23만 6천 명 가량(19년 1월 기준)입니다. 반면, 수원은 '구' 하나가 37만 명(권선구)이 넘습니다.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이번에 획정 기준으로 삼은 '인구 편차 허용범위'는 13만 6천5백여 명 이상, 27만 3천백여 명 이하입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도 정확히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28만 명가량의 춘천은 갑을 2개 선거구로 분구됐는데, 강원도 의원 정수는 변동 없이 현행 8명으로 고정됐고, 결국 춘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압축'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인구는 더 늘고, 농산어촌 인구는 더 줄어들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6개 시군 선거구지만 7개, 8개 지역이 묶인 선거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도농 격차가 벌어지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쏠림 현상이 생긴다면, 지역 양극화가 더 심화할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행 선거법에는 선거구 획정의 기준으로 인구를 두는 것 외에도,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구'만'이 기준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획정안을 두고,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법 규정을 역행했다"고 반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시작은 1년 3개월 전, 21대 총선을 위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출범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국회는 선거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획정위는 그보다 한 달 전까지 획정안을 마련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선거법에 규정돼있습니다. 다만, 법을 안 지키는 것뿐입니다.
2018년 12월에 출범한 획정위는 도대체 왜 법 규정까지 어겨가며 13개월 전이 아닌 선거 43일 전에야 획정안을 마련한 걸까요?
획정위는 출범 한 달 뒤, 국회에 지역구 정수를 확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치권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21대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253명으로 한다는 선거법은 지난해 12월에야 겨우 통과됐습니다. 획정위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숫자가 정해지기 전에는 획정 작업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선거법이 통과되고도 두 달이 넘도록, 국회는 획정위가 요구하는 시도별 정수 등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획정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국회가 제시하는 기준 없이, 획정 작업을 시작해 결과물을 내놨습니다.
기준을 보내주지 않아서 선거구 획정을 못 했다는 '독립 기구' 획정위,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의를 미루다 막판까지도 여야 합의에 실패한 국회. 어느 쪽이 더 문제라고 보십니까?
하루 만에 "다시 짜와라"…피해는 유권자
어느 지역에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고 줄일지 정하는, '시도별 정수'처럼 민감한 기준을 마련할 땐 번번이 엇갈렸던 여야가 선거구획정위가 마련한 획정안에 대해선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현행 선거법의 취지를, 획정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으니, 획정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이 외에도 앞서 여야가 (추상적으로) 합의했던 '선거구 최소 조정'과 '구역조정의 최소화'도 획정위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반발했습니다.
결국 국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가 오늘(4일) 획정위에 선거구 획정안을 다시 제출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획정안이 제출된 지 하루 만입니다.
선거법상 국회는 딱 한 번에 한해, 그 이유를 달아 획정위에 재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애초 예정됐던 내일(5일) 본회의에 선거구 획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습니다.
만약 5일에 통과되더라도 이번 선거구 획정은 역대 두 번째로 늦은 국회 통과로 기록됩니다. 안 좋은 기록을 늘 경신하는 우리 정치권이 이번에는 또 어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우게 될지요.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 듯합니다.
그때도 선거구 변동, 이로 인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반발이 잇따랐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대 국회에는 없었던, 5개 시·군이 묶인 '대형 선거구'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4.15 총선을 43일 앞둔 어제(3일), 21대 국회의원선거구 획정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6개 시·군이 묶인 '초' 대형 선거구가 등장했습니다.
이 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실제 이 선거구가 적용된다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앞으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야 합니다.
"저는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국회의원입니다."
수원은 5명…·속초-고성은 다~합쳐 1명
슈퍼 선거구를 넘어 '메가' 선거구로 불리는 이 지역. 서울 전체 면적의 8배가 넘습니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강원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휴전선 인접 지역을 모두 묶었는데, 양 끝에 위치한 속초시청에서 철원군청까지는 쉬지 않고 차를 달려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구는 기본적으로 인구(정확히는 총선 기준 15개월 전 인구)를 기준으로 획정하는데, 강원도는 면적은 넓고, 인구는 적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경기도 수원은 갑·을·병·정·무 5개의 선거구가 있고, 국회의원도 5명입니다. 하지만 강원 속초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은 6개 시군이 하나의 선거구, 국회의원도 1명입니다.
언뜻 보면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선거구 획정 기준이 되는 인구를 따져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는 6개 시군을 모두 합쳐도 23만 6천 명 가량(19년 1월 기준)입니다. 반면, 수원은 '구' 하나가 37만 명(권선구)이 넘습니다.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이번에 획정 기준으로 삼은 '인구 편차 허용범위'는 13만 6천5백여 명 이상, 27만 3천백여 명 이하입니다. 속초-고성 선거구도 정확히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28만 명가량의 춘천은 갑을 2개 선거구로 분구됐는데, 강원도 의원 정수는 변동 없이 현행 8명으로 고정됐고, 결국 춘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압축'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인구는 더 늘고, 농산어촌 인구는 더 줄어들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6개 시군 선거구지만 7개, 8개 지역이 묶인 선거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도농 격차가 벌어지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쏠림 현상이 생긴다면, 지역 양극화가 더 심화할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행 선거법에는 선거구 획정의 기준으로 인구를 두는 것 외에도,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구'만'이 기준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획정안을 두고,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법 규정을 역행했다"고 반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시작은 1년 3개월 전, 21대 총선을 위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출범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국회는 선거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획정위는 그보다 한 달 전까지 획정안을 마련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선거법에 규정돼있습니다. 다만, 법을 안 지키는 것뿐입니다.
2018년 12월에 출범한 획정위는 도대체 왜 법 규정까지 어겨가며 13개월 전이 아닌 선거 43일 전에야 획정안을 마련한 걸까요?
획정위는 출범 한 달 뒤, 국회에 지역구 정수를 확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치권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21대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253명으로 한다는 선거법은 지난해 12월에야 겨우 통과됐습니다. 획정위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숫자가 정해지기 전에는 획정 작업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선거법이 통과되고도 두 달이 넘도록, 국회는 획정위가 요구하는 시도별 정수 등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획정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국회가 제시하는 기준 없이, 획정 작업을 시작해 결과물을 내놨습니다.
기준을 보내주지 않아서 선거구 획정을 못 했다는 '독립 기구' 획정위,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의를 미루다 막판까지도 여야 합의에 실패한 국회. 어느 쪽이 더 문제라고 보십니까?
하루 만에 "다시 짜와라"…피해는 유권자
어느 지역에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고 줄일지 정하는, '시도별 정수'처럼 민감한 기준을 마련할 땐 번번이 엇갈렸던 여야가 선거구획정위가 마련한 획정안에 대해선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농산어촌의 지역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현행 선거법의 취지를, 획정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으니, 획정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이 외에도 앞서 여야가 (추상적으로) 합의했던 '선거구 최소 조정'과 '구역조정의 최소화'도 획정위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반발했습니다.
결국 국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가 오늘(4일) 획정위에 선거구 획정안을 다시 제출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획정안이 제출된 지 하루 만입니다.
선거법상 국회는 딱 한 번에 한해, 그 이유를 달아 획정위에 재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애초 예정됐던 내일(5일) 본회의에 선거구 획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습니다.
만약 5일에 통과되더라도 이번 선거구 획정은 역대 두 번째로 늦은 국회 통과로 기록됩니다. 안 좋은 기록을 늘 경신하는 우리 정치권이 이번에는 또 어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우게 될지요.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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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기자 nar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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