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김대중] 영원한 선생님 김대중의 유산 - 사회학자 한상진①

입력 2025.01.16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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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은 KBS 광주총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 연재물입니다. 월 1회 제작해 '뉴스 7 광주전남'과 '광주전남 9시 뉴스'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은 무엇인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주제로 다뤘습니다. 중민(中民)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학자이자 김대중 정부 당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한상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한 내용 가운데 방송에 내보내지 못한 한상진 교수의 말을 정리해 기사화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자 안 이탤릭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




1992년 대선, 최초의 야당 대표 TV 찬조 연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 저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92년 (겨울)에 이제 대통령 선거가 있지 않았어요? 그때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 찬조 TV 연설이 가능하게 됐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가 (후보로) 나오시니까 누가 찬조 연설을 할 것이냐를 물색하는데 그 당시 국립대학교 교수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찬조 연설을 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 당시에 이해찬 씨가 김대중 사무총장에 굉장히 가까운 참모였습니다. 저를 강력히 추천했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저는 "좋다, 나는 한다. 야당 후보를 돕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컬럼비아 대학교 안에서는 우선 유학생들이 매우 놀랐고 걱정하고… 또, 교수들도 한국에 가서 찬조 연설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이길 것 같냐고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솔직히 "난 이번에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를 떠나서 지식인으로서 야당 지도자를 돕는 것은 나는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니까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했습니다.

14대 대통령 선거유세 1992 부산.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14대 대통령 선거유세 1992 부산.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공부하는 정치인 김대중

그렇게 제가 한국에 돌아와 TV 연설을 했습니다. 1992년 12월 선거였으니까… 하여튼 선거 얼마 전에 SBS 나갔어요. 제 예상대로 (김대중 후보가) 떨어졌어요. (김대중 후보가) 정계 은퇴 선언하고, 케임브리지로 가셨지 않습니까? 저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독일의 유명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베쩨배(WZB), 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 그곳에 두 달 있기로 하고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케임브리지는 가깝고, 가봐야 하겠다. 그래서 베를린 WZB 연구소 측과 얘기해서 '김대중 선생님이 케임브리지에 계시니 한번 초청합시다' 했더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자면 그분을 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으로 초청하는 미션을 가지고 가게 됐어요. 아무런 예고 없이 그냥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혼자 계시는데 그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던 김상호 박사가 비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참 외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대선에서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하셨고, 국내에서는 김대중 팬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굉장한 슬픔이 밀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방문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제가 가니까 굉장히 반가워하시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케임브리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나의 인생은 실패인가? 나는 지난 40년 동안 간절히 바랐던 목적 달성과 국민과 민족을 위해 해보려던 뜻을 펼칠 기회를 얻는 데 또다시 실패했다. 가장 큰 슬픔은 낙선보다 지역감정과 용공 조작에 좌우되는 우리 국민, 미래를 위한 변화보다는 이기적 안전에 집착하는 국민에 대한 실망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중에서

(케임브리지 방문) 첫날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제 인상으로는 굉장히 슬픔에 사로잡혔어요. 왜냐하면 그전에 부산 초원복국 사건이 나와서 아주 분위기가… 말하자면 야당 후보가 유력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거기서 이제 역풍이 부는 거 아닙니까? 지역감정이 작동돼서 결국 떨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참 고질적이고 힘들다고 하는 당신의 그 어려운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정치인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고뇌가 얼마나 깊다고 하는 걸 뼈저리게 같이 느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중민이론'이라고 해서 중산층과 민중이 같이 더불어 가는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제 생각을 참 귀하게 생각해서 1988년 4.16 총선 이후에 저에게 자문을 요청한 적이 있고 해서 어느 정도 교감이 되어져 있는 상태지만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케임브리지에서 얘기를 아주 깊게 나누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뭐냐 '아, 이분이 공부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는 얘기는 내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나' 였습니다. 첫날 굉장히 깊은 밤까지 이야기하고, 다음 날 런던으로 갔습니다. 한인성당을 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말미에 신부님이 김대중 총재를 소개하면서 나오셔서 한 말씀 하시라고 하니까. 왜 성서에 의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건 뭐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세상을 천국에서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만드는 것이고,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자동차를 타고 떠나시는데 김대중 총재 내외는 뒤편에 앉고 저는 앞에 앉아 있었어요. 신자들이 옆으로 지나갈 거 아니에요. 신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바깥에서는 (차 안이) 안 보여요. 그런데도 총재가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항상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분이 정말 권위주의적인 분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 온몸으로 감사를 표시하는 그런 정치인이다라고 하는 걸 옆에서 보고 느꼈어요. 참 겸손하신 분이로구나.

그리고 나서 이홍구 영국대사를 만났습니다. 이홍구 대사는 이제 그전에 통일부 장관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 대사를 만나서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어요. 보통 우리가 만나면 인사를 하잖아요.' 잘 있었습니까? 영국 생활이 어떻습니까?' 서로 인사를 하는데 이런 게 전혀 없어요. 딱 만나는 순간부터 대화·질문이 시작되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하나의 특징이에요. 영국 구조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또는 영국의 금융산업이 많이 발전된 것 아닙니까? 영국 금융산업의 전망, 앞으로 통일 전망 이런 걸 가지고 계속 묻고 대답하고 3시간을 계속해서 대화해요. 그때도 보통 사람하고는 전혀 다르구나 말하자면 학구열이라고 할까.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그런 욕망이 굉장히 강하신 분이라고 강렬하게 느꼈어요.

영국 유학 중 스티븐 호킹 박사와 함께 1993. 사진 제공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영국 유학 중 스티븐 호킹 박사와 함께 1993. 사진 제공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그날 밤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영국에 와 있었던 한국인들하고 만났습니다. 그때 고려대학교에 계시는 김우창 선생님도 거기 와 계셨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는 장하준 선생님도 와 계셨고, 14명이 만나서 제 기억으로 하루에 무려 한 6시간에 걸쳐서 다시 여러 얘기를 나눴습니다. 경청하고 질문하고, 경청하고 질문하고 그랬던 그런 경험이 있어요.

■ 끊임없는 학구열…대화와 소통의 달인

그리고서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베를린으로 초청해서 한 나흘 정도를 같이 있었었는데…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WZB)에서 영어로 3단계 통일 방안을 쫙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분이 영어로 이렇게 발표하시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영어를 참 잘하세요. 그런데 굉장히 질문이 날카로워요. 한국 같으면 인정사정 봐주면서 정치인에 대한 약간의 배려가 있는데 독일 지식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3단계 통일 방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조건에서 실현 가능한 거냐. 순차적으로 이행하는 데 걸림돌이 있으면 뭐가 있느냐. 여러 가지 질문을 날카롭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또 처음에는 통역을 시킬까 하다가 통역을 놔두고 직접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참 자신만만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날 독일경제연구소라고 하는 곳을 찾아갔어요. 거기서도 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는데 계속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니까 거기에 응대했던 관계자가 '내가 만나본 지도자 가운데서 이렇게 대화가 잘 되고 열심히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하고 굉장히 감탄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동독으로 넘어갔습니다. 동독에 삼성에서 인수했던 공장이 하나가 있습니다. 공장 현장을 방문했어요. 현장 사람들의 인터뷰를 듣고, 어떤 노동자 가정까지 방문했습니다. 이제 그 집의 아들도 만나보고 딸도 만나보고 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 저축은 어떻게 하느냐. 남편과 아내는 각각 독자적인 계좌를 갖고 있느냐.' 이런 걸 다 물어보시고 굉장히 자상하게 웃으시고…. 그분은 해학이 많으신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을 많이 웃기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지지자들과 만나고, 마지막으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니 우리가 김영삼 정부 미래를 축하하자고 스스로 제안해서 이제 건배하고 헤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상진 서울대 교수 위촉장 수여 2001.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상진 서울대 교수 위촉장 수여 2001.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당시 제가 받았던 느낌은 첫째는 끊임없는 학구열. 그리고 두 번째 뭔가 이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좀 더 높은 이상을 지금 추구하려고 하는데 그 이상 중의 하나는 남북통일에 대한 비전을 좀 가꾸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하는 걸 아주 정말 가까이 느꼈습니다. 긴 일정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다 수행하시고, 이런 모습에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학자에 가까운 지성과 판단력과 대응 방법, 대화· 소통에 있어서 굉장히 탁월한 분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만난 김대중]영원한 선생님 김대중의 유산 - 사회학자 한상진 편 ② 로 이어집니다.

[다시 만난 김대중]⑩ 위기 넘어 새 시대로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37626
[다시 만난 김대중]⑨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16963
[다시 만난 김대중] 한국 최초 노벨상 수상자 김대중 -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3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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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만난 김대중] 영원한 선생님 김대중의 유산 - 사회학자 한상진①
    • 입력 2025-01-16 07:03:52
    사회
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은 KBS 광주총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 연재물입니다. 월 1회 제작해 '뉴스 7 광주전남'과 '광주전남 9시 뉴스'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은 무엇인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주제로 다뤘습니다. 중민(中民)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학자이자 김대중 정부 당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한상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한 내용 가운데 방송에 내보내지 못한 한상진 교수의 말을 정리해 기사화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자 안 이탤릭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br />



1992년 대선, 최초의 야당 대표 TV 찬조 연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 저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92년 (겨울)에 이제 대통령 선거가 있지 않았어요? 그때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 찬조 TV 연설이 가능하게 됐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가 (후보로) 나오시니까 누가 찬조 연설을 할 것이냐를 물색하는데 그 당시 국립대학교 교수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찬조 연설을 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 당시에 이해찬 씨가 김대중 사무총장에 굉장히 가까운 참모였습니다. 저를 강력히 추천했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저는 "좋다, 나는 한다. 야당 후보를 돕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컬럼비아 대학교 안에서는 우선 유학생들이 매우 놀랐고 걱정하고… 또, 교수들도 한국에 가서 찬조 연설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이길 것 같냐고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솔직히 "난 이번에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를 떠나서 지식인으로서 야당 지도자를 돕는 것은 나는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니까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했습니다.

14대 대통령 선거유세 1992 부산.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공부하는 정치인 김대중

그렇게 제가 한국에 돌아와 TV 연설을 했습니다. 1992년 12월 선거였으니까… 하여튼 선거 얼마 전에 SBS 나갔어요. 제 예상대로 (김대중 후보가) 떨어졌어요. (김대중 후보가) 정계 은퇴 선언하고, 케임브리지로 가셨지 않습니까? 저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독일의 유명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베쩨배(WZB), 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 그곳에 두 달 있기로 하고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케임브리지는 가깝고, 가봐야 하겠다. 그래서 베를린 WZB 연구소 측과 얘기해서 '김대중 선생님이 케임브리지에 계시니 한번 초청합시다' 했더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자면 그분을 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으로 초청하는 미션을 가지고 가게 됐어요. 아무런 예고 없이 그냥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혼자 계시는데 그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던 김상호 박사가 비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참 외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대선에서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하셨고, 국내에서는 김대중 팬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굉장한 슬픔이 밀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방문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제가 가니까 굉장히 반가워하시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케임브리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나의 인생은 실패인가? 나는 지난 40년 동안 간절히 바랐던 목적 달성과 국민과 민족을 위해 해보려던 뜻을 펼칠 기회를 얻는 데 또다시 실패했다. 가장 큰 슬픔은 낙선보다 지역감정과 용공 조작에 좌우되는 우리 국민, 미래를 위한 변화보다는 이기적 안전에 집착하는 국민에 대한 실망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중에서

(케임브리지 방문) 첫날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제 인상으로는 굉장히 슬픔에 사로잡혔어요. 왜냐하면 그전에 부산 초원복국 사건이 나와서 아주 분위기가… 말하자면 야당 후보가 유력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거기서 이제 역풍이 부는 거 아닙니까? 지역감정이 작동돼서 결국 떨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참 고질적이고 힘들다고 하는 당신의 그 어려운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정치인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고뇌가 얼마나 깊다고 하는 걸 뼈저리게 같이 느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중민이론'이라고 해서 중산층과 민중이 같이 더불어 가는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제 생각을 참 귀하게 생각해서 1988년 4.16 총선 이후에 저에게 자문을 요청한 적이 있고 해서 어느 정도 교감이 되어져 있는 상태지만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케임브리지에서 얘기를 아주 깊게 나누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뭐냐 '아, 이분이 공부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는 얘기는 내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나' 였습니다. 첫날 굉장히 깊은 밤까지 이야기하고, 다음 날 런던으로 갔습니다. 한인성당을 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말미에 신부님이 김대중 총재를 소개하면서 나오셔서 한 말씀 하시라고 하니까. 왜 성서에 의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건 뭐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세상을 천국에서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만드는 것이고,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자동차를 타고 떠나시는데 김대중 총재 내외는 뒤편에 앉고 저는 앞에 앉아 있었어요. 신자들이 옆으로 지나갈 거 아니에요. 신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바깥에서는 (차 안이) 안 보여요. 그런데도 총재가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항상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분이 정말 권위주의적인 분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 온몸으로 감사를 표시하는 그런 정치인이다라고 하는 걸 옆에서 보고 느꼈어요. 참 겸손하신 분이로구나.

그리고 나서 이홍구 영국대사를 만났습니다. 이홍구 대사는 이제 그전에 통일부 장관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 대사를 만나서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어요. 보통 우리가 만나면 인사를 하잖아요.' 잘 있었습니까? 영국 생활이 어떻습니까?' 서로 인사를 하는데 이런 게 전혀 없어요. 딱 만나는 순간부터 대화·질문이 시작되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하나의 특징이에요. 영국 구조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또는 영국의 금융산업이 많이 발전된 것 아닙니까? 영국 금융산업의 전망, 앞으로 통일 전망 이런 걸 가지고 계속 묻고 대답하고 3시간을 계속해서 대화해요. 그때도 보통 사람하고는 전혀 다르구나 말하자면 학구열이라고 할까.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그런 욕망이 굉장히 강하신 분이라고 강렬하게 느꼈어요.

영국 유학 중 스티븐 호킹 박사와 함께 1993. 사진 제공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그날 밤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영국에 와 있었던 한국인들하고 만났습니다. 그때 고려대학교에 계시는 김우창 선생님도 거기 와 계셨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는 장하준 선생님도 와 계셨고, 14명이 만나서 제 기억으로 하루에 무려 한 6시간에 걸쳐서 다시 여러 얘기를 나눴습니다. 경청하고 질문하고, 경청하고 질문하고 그랬던 그런 경험이 있어요.

■ 끊임없는 학구열…대화와 소통의 달인

그리고서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베를린으로 초청해서 한 나흘 정도를 같이 있었었는데…베를린 사회과학연구원(WZB)에서 영어로 3단계 통일 방안을 쫙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분이 영어로 이렇게 발표하시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영어를 참 잘하세요. 그런데 굉장히 질문이 날카로워요. 한국 같으면 인정사정 봐주면서 정치인에 대한 약간의 배려가 있는데 독일 지식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3단계 통일 방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조건에서 실현 가능한 거냐. 순차적으로 이행하는 데 걸림돌이 있으면 뭐가 있느냐. 여러 가지 질문을 날카롭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또 처음에는 통역을 시킬까 하다가 통역을 놔두고 직접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참 자신만만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날 독일경제연구소라고 하는 곳을 찾아갔어요. 거기서도 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는데 계속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니까 거기에 응대했던 관계자가 '내가 만나본 지도자 가운데서 이렇게 대화가 잘 되고 열심히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하고 굉장히 감탄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동독으로 넘어갔습니다. 동독에 삼성에서 인수했던 공장이 하나가 있습니다. 공장 현장을 방문했어요. 현장 사람들의 인터뷰를 듣고, 어떤 노동자 가정까지 방문했습니다. 이제 그 집의 아들도 만나보고 딸도 만나보고 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 저축은 어떻게 하느냐. 남편과 아내는 각각 독자적인 계좌를 갖고 있느냐.' 이런 걸 다 물어보시고 굉장히 자상하게 웃으시고…. 그분은 해학이 많으신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을 많이 웃기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지지자들과 만나고, 마지막으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니 우리가 김영삼 정부 미래를 축하하자고 스스로 제안해서 이제 건배하고 헤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상진 서울대 교수 위촉장 수여 2001. 사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당시 제가 받았던 느낌은 첫째는 끊임없는 학구열. 그리고 두 번째 뭔가 이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좀 더 높은 이상을 지금 추구하려고 하는데 그 이상 중의 하나는 남북통일에 대한 비전을 좀 가꾸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하는 걸 아주 정말 가까이 느꼈습니다. 긴 일정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다 수행하시고, 이런 모습에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학자에 가까운 지성과 판단력과 대응 방법, 대화· 소통에 있어서 굉장히 탁월한 분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만난 김대중]영원한 선생님 김대중의 유산 - 사회학자 한상진 편 ② 로 이어집니다.

[다시 만난 김대중]⑩ 위기 넘어 새 시대로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37626
[다시 만난 김대중]⑨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16963
[다시 만난 김대중] 한국 최초 노벨상 수상자 김대중 -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3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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