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명문가는 따로 있다”…대 이어 나라 지킨 독립운동 가문 [광복80주년] ②
입력 2025.08.08 (08:00)
수정 2025.08.0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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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 장남, 경영 수업 본격화", "△△ 재벌가 결혼", "□□□ 일가 3세 연예계 데뷔". 이른바 '금수저'로 불리는 재벌가의 일거수 일투족이 온갖 뉴스가 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진짜 '명문가'는 따로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딸과 아들, 사위에 손자, 손녀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 명문가'입니다. 백범 김구, 백산 지청천, 그리고 조소앙 선생까지…. 모두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 가문인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아 후손들을 직접 만나 조상들의 가르침은 어땠는지, 광복 80년을 맞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들어봤습니다. |
■ 나라 잃은 슬픔에 자결 시도한 신규식 선생… 대 이어 임시정부 외교 활동
187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규식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단재 신채호, 경부 신백우 선생과 더불어 '청주 동쪽에서 태어난 세 천재'란 뜻을 담아 ‘산동삼재(山東三才)’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 무관의 길을 걸었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슬픔에 음독 자결했다 시신경이 손상돼 흘겨보는 듯한 시선을 갖게 됐습니다.
흘겨볼 '예', 볼 '관'. 스스로 '예관'이라 붙인 호에서 그 분노와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현지 혁명파와 교류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주춧돌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 등을 지낸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동제사’를 조직해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관의 독립 의지는 그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신명호는 1919년 상해로 건너와, 이듬해 민필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데요.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담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한 사위 민필호는 임시정부 요원을 지원하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약했습니다.
딸 신명호는 아버지인 신규식과 남편인 민필호를 포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의 활동 또한 지원했습니다.
이들의 딸, 즉 신규식 선생의 외손녀인 민영주는 광복군으로 활약했습니다.
독립을 향한 신규식 선생의 열망은 이렇게 후대로 이어져 3대에 걸친 독립운동 명가를 이뤘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4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습니다.
신규식 선생의 외손자인 민영백 씨는 그런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민필호 선생에게 늘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네가 제일 존경해야 할 분은 너의 외할아버지"라는 말이었습니다.
민영백 씨는 부모님이 늘 외할아버지의 업적과 활약을 자신에게 전해줬다며, '독립운동의 정신은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가족들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품고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임시정부의 파수꾼, 성암 이광 선생… 교포 송환 문제 매듭
충북 청주 출신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성암 이광 선생도 있습니다.
이광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에 주력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과 안정화, 외교 활동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엔 '한교선무단'을 조직해, 중국으로 떠난 한인들이 고향으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도왔습니다.
중국에 남은 한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생활 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다 1948년이 되어서야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광 선생의 부인 김수현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창당된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하고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이광 선생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요.
장녀인 이국영 선생은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연극, 공연 등 선전 활동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했고, 어머니 김수현 선생과 마찬가지로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 헌신했습니다.
이광 선생의 두 아들인 이윤장, 이윤철 선생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참여해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이 세 남매는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돼 애국장과 애족장이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이윤철 선생의 아들, 즉 이광 선생의 손자 이원표 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른 집에도 다 독립 유공자가 많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집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다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보니, 이를 당연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밀 유지를 위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충과 설움을 많이 겪었다며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 대를 이은 독립운동… "부모에서 자녀 세대로 독립 의지 계승"
혈연에 기반해 독립운동을 이어간 사례가 드문 건 아닙니다.
백범 김구의 아들인 김인과 김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의 딸 지복영은 훗날 광복군에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 선생의 아들 조인제 역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에서 인사과장, 참령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한 이들의 애국정신과 실천은 대를 이어 전해져 독립운동 명문가를 일궜습니다.
광복 80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을 외친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충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홍순영 청남대관리사업소 학예사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관용적인 표현을 들며, "대를 이은 독립운동 사례가 다양하긴 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너무나 큰 고난과 희생이 동반되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한 기반 위에 부모에서 자녀 세대로 민족 독립의 의지가 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전해줘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도 전했습니다.
"조상분들의 그런 피나는 노력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가 이 안온함을 가질 수가 있었는지를 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조상분들의 덕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죠. 하지만 '내가 누구의 후손이다.' 이 말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나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 않으면 창피한 말이 되거든요." - 이원표, 독립운동가 이광 선생 손자- |
광복 8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답은 이원표 씨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로에 관해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상기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답했지만, 한편으로는 인터뷰 내내 '부끄럽다'는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는데요.
지나온 삶을 겸손하게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부단히 고민하는 그의 자세에서 역사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연관 기사] 딸·아들·사위까지…대를 이은 독립운동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72632)
촬영기자 강사완, 그래픽 박소현·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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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명문가는 따로 있다”…대 이어 나라 지킨 독립운동 가문 [광복80주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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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8-08 08:00:09
- 수정2025-08-08 09:18:52

"○○ 기업 장남, 경영 수업 본격화", "△△ 재벌가 결혼", "□□□ 일가 3세 연예계 데뷔". 이른바 '금수저'로 불리는 재벌가의 일거수 일투족이 온갖 뉴스가 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진짜 '명문가'는 따로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딸과 아들, 사위에 손자, 손녀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 명문가'입니다. 백범 김구, 백산 지청천, 그리고 조소앙 선생까지…. 모두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 가문인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아 후손들을 직접 만나 조상들의 가르침은 어땠는지, 광복 80년을 맞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들어봤습니다. |
■ 나라 잃은 슬픔에 자결 시도한 신규식 선생… 대 이어 임시정부 외교 활동
187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규식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단재 신채호, 경부 신백우 선생과 더불어 '청주 동쪽에서 태어난 세 천재'란 뜻을 담아 ‘산동삼재(山東三才)’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 무관의 길을 걸었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슬픔에 음독 자결했다 시신경이 손상돼 흘겨보는 듯한 시선을 갖게 됐습니다.
흘겨볼 '예', 볼 '관'. 스스로 '예관'이라 붙인 호에서 그 분노와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현지 혁명파와 교류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주춧돌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 등을 지낸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동제사’를 조직해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관의 독립 의지는 그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신명호는 1919년 상해로 건너와, 이듬해 민필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데요.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담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한 사위 민필호는 임시정부 요원을 지원하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약했습니다.
딸 신명호는 아버지인 신규식과 남편인 민필호를 포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의 활동 또한 지원했습니다.
이들의 딸, 즉 신규식 선생의 외손녀인 민영주는 광복군으로 활약했습니다.
독립을 향한 신규식 선생의 열망은 이렇게 후대로 이어져 3대에 걸친 독립운동 명가를 이뤘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4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습니다.
신규식 선생의 외손자인 민영백 씨는 그런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민필호 선생에게 늘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네가 제일 존경해야 할 분은 너의 외할아버지"라는 말이었습니다.
민영백 씨는 부모님이 늘 외할아버지의 업적과 활약을 자신에게 전해줬다며, '독립운동의 정신은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가족들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품고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임시정부의 파수꾼, 성암 이광 선생… 교포 송환 문제 매듭
충북 청주 출신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성암 이광 선생도 있습니다.
이광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에 주력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과 안정화, 외교 활동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엔 '한교선무단'을 조직해, 중국으로 떠난 한인들이 고향으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도왔습니다.
중국에 남은 한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생활 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다 1948년이 되어서야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광 선생의 부인 김수현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창당된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하고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이광 선생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요.
장녀인 이국영 선생은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연극, 공연 등 선전 활동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했고, 어머니 김수현 선생과 마찬가지로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 헌신했습니다.
이광 선생의 두 아들인 이윤장, 이윤철 선생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참여해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이 세 남매는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돼 애국장과 애족장이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이윤철 선생의 아들, 즉 이광 선생의 손자 이원표 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른 집에도 다 독립 유공자가 많은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집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다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보니, 이를 당연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밀 유지를 위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충과 설움을 많이 겪었다며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 대를 이은 독립운동… "부모에서 자녀 세대로 독립 의지 계승"
혈연에 기반해 독립운동을 이어간 사례가 드문 건 아닙니다.
백범 김구의 아들인 김인과 김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의 딸 지복영은 훗날 광복군에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 선생의 아들 조인제 역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에서 인사과장, 참령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한 이들의 애국정신과 실천은 대를 이어 전해져 독립운동 명문가를 일궜습니다.
광복 80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을 외친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충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홍순영 청남대관리사업소 학예사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관용적인 표현을 들며, "대를 이은 독립운동 사례가 다양하긴 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너무나 큰 고난과 희생이 동반되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한 기반 위에 부모에서 자녀 세대로 민족 독립의 의지가 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전해줘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도 전했습니다.
"조상분들의 그런 피나는 노력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가 이 안온함을 가질 수가 있었는지를 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조상분들의 덕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죠. 하지만 '내가 누구의 후손이다.' 이 말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나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 않으면 창피한 말이 되거든요." - 이원표, 독립운동가 이광 선생 손자- |
광복 8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답은 이원표 씨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로에 관해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상기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답했지만, 한편으로는 인터뷰 내내 '부끄럽다'는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는데요.
지나온 삶을 겸손하게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부단히 고민하는 그의 자세에서 역사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연관 기사] 딸·아들·사위까지…대를 이은 독립운동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72632)
촬영기자 강사완, 그래픽 박소현·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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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아 기자 msa46@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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