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부조리한 권력 현상과 소시민적 충동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입력 2021.06.13 (21:30)
수정 2021.06.13 (21:3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문열의 중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권력 관계와 그 작동 원리에 대한 면밀한 추적을 통해 당대 현실은 물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한 권력 현상의 속내를 비판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소설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 한병태의 3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유당 말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읍 소재지의 작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가 전학 온 학급이 엄석대의 억압적인 권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학급 아이들은 엄석대의 지시와 통제 속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엄석대는 “무정하고 성의 없는” 담임선생님의 방관 속에서 불합리와 폭력에 기반한 지배 권력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구사하고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양적으로는 누구보다 학급을 잘 선도하고 관장하는 탁월한 급장이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매우 우수한 모범 학생이다.
한병태는 서울내기의 강단으로 엄석대의 허상을 무너트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엄석대의 대응 방식은 의외로 단순치 않다. 그는 한병태를 향해 직접적인 폭력보다 담임선생님께 위임받은 권력을 영악하게 이용하여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소외와 배제 등의 얼굴 없는 폭력을 다채롭게 구사하며 포위해 온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피해를 본 학급 급우들과 연대를 도모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들은 오히려 엄석대의 부당한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지탱시키는 공모자들이다. 엄석대에게 자신의 귀중품을 빼앗기고도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굴종하고 체념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돌아가면서 엄석대의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는 치명적인 부정까지 저지른다. 부당한 권력 관계는 권력자의 지배 술책뿐만이 아니라 이에 쉽게 굴복하고 순응하고 더 나아가 의지하려는 학급 구성원들의 나약하고 비굴한 속성에 의해 더욱 재생산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병태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엄석대의 부당함을 호소해 보지만 도움을 얻기는커녕 핀잔만 듣는다.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무한 신뢰를 보일 뿐이고, 아버지는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인물이 되겠다.” 고 감탄까지 한다. 아버지 역시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권력적 지배 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병태의 외롭고 고달픈 싸움은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봉착하게 된다.
한병태는 저항을 포기하면서 엄석대의 절대 권력의 보호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엄석대는 자신에게 투항한 한병태에게 권력에 종속된 자의 달콤함에 젖어들게 한다. 그는 한병태의 외로운 저항의 경력을 오히려 훈장의 특전으로 돌려주는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어느새 한병태는 급우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엄석대와 근접한 거리에 있게 된다.
그러나 엄석대의 지배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혁명적 사건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다.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에 의해 엄석대의 허구가 전면에 들추어진다. 엄석대는 학급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초라한 비행 학생으로 추락한다. 학급 분위기는 크게 동요된다. 절대 권력이 엄석대에서 새로 부임한 선생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급우들은 엄석대의 잘못들을 앞다투어 고발하기 시작한다. 새로 시작하는 급장 선거는 합리와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 절차로 진행된다. 엄석대로 표상되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한병태는 엄석대의 잘못을 고발하지도 새로운 민주적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부당한 권력과 공모관계를 이루었던 급우들의 느닷없는 정의감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따라 이동하는 변절에 가깝게 이해된다. 이들에게서 자기 성찰과 주체적 변혁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적 질서라 하더라도 어차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대중들은 또 거기에 굴종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또 다른 지배 권력이 다시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확산되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겠는가. 한병태는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한병태는 사회인이 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읍내 초등학교 교실의 엄석대로 표상되는 부조리한 권력 세계와 흡사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엄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엄석대에 대한 기억은 점차 그리움으로 전이되어 간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엄석대와 같은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순종하면서 안주할 수 있는 소시민적 충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한병태가 우연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엄석대를 만난 이후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와 함께 비감을 동시에 느끼는 마지막 대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덧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현실 세계의 소시민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권력관계와 그 작동 원리를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의 초상을 거울처럼 반사시키고 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소설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 한병태의 3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유당 말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읍 소재지의 작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가 전학 온 학급이 엄석대의 억압적인 권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학급 아이들은 엄석대의 지시와 통제 속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엄석대는 “무정하고 성의 없는” 담임선생님의 방관 속에서 불합리와 폭력에 기반한 지배 권력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구사하고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양적으로는 누구보다 학급을 잘 선도하고 관장하는 탁월한 급장이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매우 우수한 모범 학생이다.
한병태는 서울내기의 강단으로 엄석대의 허상을 무너트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엄석대의 대응 방식은 의외로 단순치 않다. 그는 한병태를 향해 직접적인 폭력보다 담임선생님께 위임받은 권력을 영악하게 이용하여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소외와 배제 등의 얼굴 없는 폭력을 다채롭게 구사하며 포위해 온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피해를 본 학급 급우들과 연대를 도모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들은 오히려 엄석대의 부당한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지탱시키는 공모자들이다. 엄석대에게 자신의 귀중품을 빼앗기고도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굴종하고 체념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돌아가면서 엄석대의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는 치명적인 부정까지 저지른다. 부당한 권력 관계는 권력자의 지배 술책뿐만이 아니라 이에 쉽게 굴복하고 순응하고 더 나아가 의지하려는 학급 구성원들의 나약하고 비굴한 속성에 의해 더욱 재생산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병태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엄석대의 부당함을 호소해 보지만 도움을 얻기는커녕 핀잔만 듣는다.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무한 신뢰를 보일 뿐이고, 아버지는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인물이 되겠다.” 고 감탄까지 한다. 아버지 역시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권력적 지배 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병태의 외롭고 고달픈 싸움은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봉착하게 된다.
한병태는 저항을 포기하면서 엄석대의 절대 권력의 보호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엄석대는 자신에게 투항한 한병태에게 권력에 종속된 자의 달콤함에 젖어들게 한다. 그는 한병태의 외로운 저항의 경력을 오히려 훈장의 특전으로 돌려주는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어느새 한병태는 급우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엄석대와 근접한 거리에 있게 된다.
그러나 엄석대의 지배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혁명적 사건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다.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에 의해 엄석대의 허구가 전면에 들추어진다. 엄석대는 학급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초라한 비행 학생으로 추락한다. 학급 분위기는 크게 동요된다. 절대 권력이 엄석대에서 새로 부임한 선생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급우들은 엄석대의 잘못들을 앞다투어 고발하기 시작한다. 새로 시작하는 급장 선거는 합리와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 절차로 진행된다. 엄석대로 표상되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한병태는 엄석대의 잘못을 고발하지도 새로운 민주적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부당한 권력과 공모관계를 이루었던 급우들의 느닷없는 정의감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따라 이동하는 변절에 가깝게 이해된다. 이들에게서 자기 성찰과 주체적 변혁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적 질서라 하더라도 어차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대중들은 또 거기에 굴종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또 다른 지배 권력이 다시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확산되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겠는가. 한병태는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한병태는 사회인이 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읍내 초등학교 교실의 엄석대로 표상되는 부조리한 권력 세계와 흡사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엄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엄석대에 대한 기억은 점차 그리움으로 전이되어 간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엄석대와 같은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순종하면서 안주할 수 있는 소시민적 충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한병태가 우연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엄석대를 만난 이후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와 함께 비감을 동시에 느끼는 마지막 대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덧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현실 세계의 소시민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권력관계와 그 작동 원리를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의 초상을 거울처럼 반사시키고 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비평] 부조리한 권력 현상과 소시민적 충동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 입력 2021-06-13 21:30:20
- 수정2021-06-13 21:31:55
이문열의 중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권력 관계와 그 작동 원리에 대한 면밀한 추적을 통해 당대 현실은 물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한 권력 현상의 속내를 비판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소설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 한병태의 3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유당 말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읍 소재지의 작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가 전학 온 학급이 엄석대의 억압적인 권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학급 아이들은 엄석대의 지시와 통제 속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엄석대는 “무정하고 성의 없는” 담임선생님의 방관 속에서 불합리와 폭력에 기반한 지배 권력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구사하고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양적으로는 누구보다 학급을 잘 선도하고 관장하는 탁월한 급장이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매우 우수한 모범 학생이다.
한병태는 서울내기의 강단으로 엄석대의 허상을 무너트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엄석대의 대응 방식은 의외로 단순치 않다. 그는 한병태를 향해 직접적인 폭력보다 담임선생님께 위임받은 권력을 영악하게 이용하여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소외와 배제 등의 얼굴 없는 폭력을 다채롭게 구사하며 포위해 온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피해를 본 학급 급우들과 연대를 도모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들은 오히려 엄석대의 부당한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지탱시키는 공모자들이다. 엄석대에게 자신의 귀중품을 빼앗기고도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굴종하고 체념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돌아가면서 엄석대의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는 치명적인 부정까지 저지른다. 부당한 권력 관계는 권력자의 지배 술책뿐만이 아니라 이에 쉽게 굴복하고 순응하고 더 나아가 의지하려는 학급 구성원들의 나약하고 비굴한 속성에 의해 더욱 재생산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병태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엄석대의 부당함을 호소해 보지만 도움을 얻기는커녕 핀잔만 듣는다.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무한 신뢰를 보일 뿐이고, 아버지는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인물이 되겠다.” 고 감탄까지 한다. 아버지 역시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권력적 지배 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병태의 외롭고 고달픈 싸움은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봉착하게 된다.
한병태는 저항을 포기하면서 엄석대의 절대 권력의 보호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엄석대는 자신에게 투항한 한병태에게 권력에 종속된 자의 달콤함에 젖어들게 한다. 그는 한병태의 외로운 저항의 경력을 오히려 훈장의 특전으로 돌려주는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어느새 한병태는 급우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엄석대와 근접한 거리에 있게 된다.
그러나 엄석대의 지배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혁명적 사건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다.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에 의해 엄석대의 허구가 전면에 들추어진다. 엄석대는 학급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초라한 비행 학생으로 추락한다. 학급 분위기는 크게 동요된다. 절대 권력이 엄석대에서 새로 부임한 선생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급우들은 엄석대의 잘못들을 앞다투어 고발하기 시작한다. 새로 시작하는 급장 선거는 합리와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 절차로 진행된다. 엄석대로 표상되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한병태는 엄석대의 잘못을 고발하지도 새로운 민주적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부당한 권력과 공모관계를 이루었던 급우들의 느닷없는 정의감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따라 이동하는 변절에 가깝게 이해된다. 이들에게서 자기 성찰과 주체적 변혁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적 질서라 하더라도 어차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대중들은 또 거기에 굴종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또 다른 지배 권력이 다시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확산되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겠는가. 한병태는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한병태는 사회인이 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읍내 초등학교 교실의 엄석대로 표상되는 부조리한 권력 세계와 흡사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엄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엄석대에 대한 기억은 점차 그리움으로 전이되어 간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엄석대와 같은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순종하면서 안주할 수 있는 소시민적 충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한병태가 우연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엄석대를 만난 이후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와 함께 비감을 동시에 느끼는 마지막 대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덧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현실 세계의 소시민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권력관계와 그 작동 원리를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의 초상을 거울처럼 반사시키고 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소설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 한병태의 3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유당 말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읍 소재지의 작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가 전학 온 학급이 엄석대의 억압적인 권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학급 아이들은 엄석대의 지시와 통제 속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엄석대는 “무정하고 성의 없는” 담임선생님의 방관 속에서 불합리와 폭력에 기반한 지배 권력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구사하고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양적으로는 누구보다 학급을 잘 선도하고 관장하는 탁월한 급장이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매우 우수한 모범 학생이다.
한병태는 서울내기의 강단으로 엄석대의 허상을 무너트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엄석대의 대응 방식은 의외로 단순치 않다. 그는 한병태를 향해 직접적인 폭력보다 담임선생님께 위임받은 권력을 영악하게 이용하여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소외와 배제 등의 얼굴 없는 폭력을 다채롭게 구사하며 포위해 온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피해를 본 학급 급우들과 연대를 도모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들은 오히려 엄석대의 부당한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지탱시키는 공모자들이다. 엄석대에게 자신의 귀중품을 빼앗기고도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굴종하고 체념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돌아가면서 엄석대의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는 치명적인 부정까지 저지른다. 부당한 권력 관계는 권력자의 지배 술책뿐만이 아니라 이에 쉽게 굴복하고 순응하고 더 나아가 의지하려는 학급 구성원들의 나약하고 비굴한 속성에 의해 더욱 재생산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병태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엄석대의 부당함을 호소해 보지만 도움을 얻기는커녕 핀잔만 듣는다.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무한 신뢰를 보일 뿐이고, 아버지는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인물이 되겠다.” 고 감탄까지 한다. 아버지 역시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권력적 지배 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병태의 외롭고 고달픈 싸움은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봉착하게 된다.
한병태는 저항을 포기하면서 엄석대의 절대 권력의 보호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엄석대는 자신에게 투항한 한병태에게 권력에 종속된 자의 달콤함에 젖어들게 한다. 그는 한병태의 외로운 저항의 경력을 오히려 훈장의 특전으로 돌려주는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어느새 한병태는 급우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엄석대와 근접한 거리에 있게 된다.
그러나 엄석대의 지배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혁명적 사건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다.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에 의해 엄석대의 허구가 전면에 들추어진다. 엄석대는 학급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초라한 비행 학생으로 추락한다. 학급 분위기는 크게 동요된다. 절대 권력이 엄석대에서 새로 부임한 선생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급우들은 엄석대의 잘못들을 앞다투어 고발하기 시작한다. 새로 시작하는 급장 선거는 합리와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 절차로 진행된다. 엄석대로 표상되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한병태는 엄석대의 잘못을 고발하지도 새로운 민주적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부당한 권력과 공모관계를 이루었던 급우들의 느닷없는 정의감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따라 이동하는 변절에 가깝게 이해된다. 이들에게서 자기 성찰과 주체적 변혁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적 질서라 하더라도 어차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대중들은 또 거기에 굴종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또 다른 지배 권력이 다시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확산되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겠는가. 한병태는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한병태는 사회인이 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읍내 초등학교 교실의 엄석대로 표상되는 부조리한 권력 세계와 흡사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엄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엄석대에 대한 기억은 점차 그리움으로 전이되어 간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엄석대와 같은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순종하면서 안주할 수 있는 소시민적 충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한병태가 우연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엄석대를 만난 이후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와 함께 비감을 동시에 느끼는 마지막 대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덧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합리와 자유와는 거리가 먼 현실 세계의 소시민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권력관계와 그 작동 원리를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의 초상을 거울처럼 반사시키고 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
-
정연욱 기자 donkey@kbs.co.kr
정연욱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시리즈
우리 시대의 소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