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지옥도’가 불러낸 기억의 ‘굿판’…황석영 ‘손님’

입력 2021.08.22 (21:26) 수정 2021.08.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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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함께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소개해 드리는 시간, 오늘(22일)은 가장 많은 평론가의 지지를 받은 황석영의 장편, '손님'을 만나보겠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신천 대학살' 사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전통 굿의 형식으로 소환해 용서와 화해를 모색한 작품인데요.

황석영 작품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소설, 정연욱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불과 50여 일 동안 주민 3만 5천여 명이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소설가조차 믿기 어려웠던 사실이자 역사였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건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이 흘러 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하나로 고향 황해도를 방문하게 된 소설의 주인공 요섭.

미국 뉴저지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여정에 귀신들이 따라붙기 시작합니다.

학살의 주역이었던 형 요한, 그리고 형이 잔인하게 죽였지만 한때 가족처럼 지냈던 삼촌, 아저씨들입니다.

이 귀신들이 수시로 나타나 그날의 끔찍한 광경을 담담하게 회고하며,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주범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란 두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황석영/소설가 :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그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 거야."]

서로를 용서할 수도 없게 된 가해자와 희생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장치로 황석영은 전통 굿을 선택했습니다.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지노귀굿' 열두 마당 속에서 귀신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용기 있게 과거를 직시하고 화해와 용서를 시도합니다.

[황석영/소설가 : "우리나라 무속이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우리 무속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한국전쟁 50주년인 2000년 집필해 이듬해 발표했지만, 구상의 계기는 1989년 방북, 그리고 이후 4년간의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낸 후유증은 집필 과정에서도 아프게 반복됐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노작가는 앞으로 10년은 더 소설을 써야겠다면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각인되고 싶다는 바람도 털어놨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란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지 증명해 온 작품들.

작가 황석영이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대작가'로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이재복/문학평론가 : "사회와 역사에 기반을 둔 양식이 소설이잖아요. 그런 것이 황석영 소설에 잘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경향을 지녔든, 어떤 진영이든 황석영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황석영이 소환한 역사의 주인공은 어떤 사건이나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때로는 문학의 언어가 역사의 진실을 더 생생히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 실감할 수 있습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박세준 류재현/그래픽:한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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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의 ‘지옥도’가 불러낸 기억의 ‘굿판’…황석영 ‘손님’
    • 입력 2021-08-22 21:26:06
    • 수정2021-08-22 21: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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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함께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소개해 드리는 시간, 오늘(22일)은 가장 많은 평론가의 지지를 받은 황석영의 장편, '손님'을 만나보겠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신천 대학살' 사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전통 굿의 형식으로 소환해 용서와 화해를 모색한 작품인데요.

황석영 작품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소설, 정연욱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불과 50여 일 동안 주민 3만 5천여 명이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소설가조차 믿기 어려웠던 사실이자 역사였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건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이 흘러 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하나로 고향 황해도를 방문하게 된 소설의 주인공 요섭.

미국 뉴저지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여정에 귀신들이 따라붙기 시작합니다.

학살의 주역이었던 형 요한, 그리고 형이 잔인하게 죽였지만 한때 가족처럼 지냈던 삼촌, 아저씨들입니다.

이 귀신들이 수시로 나타나 그날의 끔찍한 광경을 담담하게 회고하며,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주범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란 두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황석영/소설가 :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그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 거야."]

서로를 용서할 수도 없게 된 가해자와 희생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장치로 황석영은 전통 굿을 선택했습니다.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지노귀굿' 열두 마당 속에서 귀신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용기 있게 과거를 직시하고 화해와 용서를 시도합니다.

[황석영/소설가 : "우리나라 무속이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우리 무속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한국전쟁 50주년인 2000년 집필해 이듬해 발표했지만, 구상의 계기는 1989년 방북, 그리고 이후 4년간의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낸 후유증은 집필 과정에서도 아프게 반복됐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노작가는 앞으로 10년은 더 소설을 써야겠다면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각인되고 싶다는 바람도 털어놨습니다.

[황석영/소설가 :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란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지 증명해 온 작품들.

작가 황석영이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대작가'로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이재복/문학평론가 : "사회와 역사에 기반을 둔 양식이 소설이잖아요. 그런 것이 황석영 소설에 잘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경향을 지녔든, 어떤 진영이든 황석영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황석영이 소환한 역사의 주인공은 어떤 사건이나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때로는 문학의 언어가 역사의 진실을 더 생생히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 실감할 수 있습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박세준 류재현/그래픽:한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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