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원고지 16,500매로 쌓아 올린 진실의 두께…조정래 ‘태백산맥’

입력 2021.11.07 (21:40) 수정 2021.11.0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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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소설가

Q. 소설이 '여순사건'으로 시작하는데?

그 전에는 국가 공식 명칭이 '여순반란사건'이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반란이라는 말이 시대적 역사성도 안 맞고 봉건시대 용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 제주도 4·3 사건을 강제진압해서 '동포를 죽여라' 하는 것에 대한 항거였기 때문에 반란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반란을 빼버리고 '여순 사건' 이라고 썼습니다. 그게 전두환 정권 때였기 때문에 그런 도전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써서, 그 다음부터는 사회학 모든 서적이 '여순사건'이라고 공식 명칭을 바꿨습니다. 지금 모든 매스컴들이 전부 '여순사건'이라고 씁니다. 이런 것이 작가가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조그마한 욕구였고 성취였죠.

Q. 소설의 무대가 벌교인 이유?

벌교라는 드문, 낯선 지명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입니다. 뗏목 다리, 뗏목으로 만든 다리를 벌교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포구로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들고 나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합니다. 여기가 저 조계산 쪽에서부터 와가지고 고흥 쪽으로 넘어가는데 물이 들어와 버리면 사람이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때 뗏목을 엮어서 부교, 물이 들어오면 뜨고 물이 빠지면 내려가는 부교를 설치했던 곳인데, 그래서 벌교란 말이 생긴 것이죠. 뗏목 다리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지명이 벌교고, 그 벌교라고 하는 곳이 갖는 역사성과 사회성 이런 것은 그 다른 곳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갯가를 물고 있는, 바다와 인접해 있는 땅끝 마을이면서 낙안읍성이 생긴 것은 바로 일제시대부터 왜구들이 계속 약탈을 해왔던 곳이고, 그 역사성 속에서 해방이 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싶어했던 민중들의 욕구가 불타올랐던 그런 곳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빨치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산사람(빨치산)이 별 게 아니고 삶 속에서 차별, 경제 불평등, 요즘 말로 하면. 그러니까 산업경제가 없던 농업 농본시대에는 소작과 지주 관계잖아요. 그것이 바뀌어서 산업화되면서 기업과 노동자가 됐듯이 사회구조는 언어(표현)만 달라졌지 똑같이 변화가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불평등, 경제 불평등이잖아요. 부익부 빈익빈 자본주의의 마성이 바로 그거잖아요. 산사람(빨치산)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생활에서 필요한, 도저히 더 이상 개선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는, 삶을 더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동학 때,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도 똑같아요. 다만 이데올로기와 시대가 다를 뿐이다.

Q. 원고지 16,500매에 담고자 했던 것?

제가 태백산맥을 시작할 때 제 키를 넘는 원고량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지 못했죠. <태백산맥>은 가려지고 숨겨지고 파묻혀 있는 역사를 햇볕 아래로 드러낸,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진실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태백산맥>의 높이는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진실의 두께와 비례합니다.

1994년 <태백산맥>과 조정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다.
11년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검찰은, 2005년 '무혐의' 결정을 내린다.

Q.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 11년 만에 무혐의 결정

그 무혐의 처분의 결정서가 이것이고, 저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이 땅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됐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는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백산맥>이 고발되기 전에, 1990년 되기 전에 검찰에서 자체 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렸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그래서 문제 삼지 않기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읽으면 좋으나, 젊은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그건 불온서적으로 취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안방에서 읽으면 교양물이 되고, 대학생 아들이 건넛방에서 읽으면 불온서적이 된다는 말이냐? 하고 야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Q. 평범한 독자들이 손으로 옮겨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이 자기들이 솔선해서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한 것입니다. 저는 태백산맥문학관 중에서 여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저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썼지만, 독자들이 어떻게 이 많은 양을 이렇게 엄청나게 쓸 수 있었는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마흔아홉 명이고 지금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증축을 하도록 지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저한테 얘기해주는데, 그 사람이 전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의 문학관을 다 봤는데 이렇게 빅토르 위고나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나 괴테나 그런 사람들 문학관에도, 독자들이 그의 대표작을 이렇게 필사한 일이 한 번도 없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일이고 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글 쓰는 보람을 한없이 느끼고 끝없이 행복합니다. 감탄과 경탄과 고마움과 말로 헤아릴 수가 없었죠. 한 번 읽기도 어려운데 이것을 몇 개월에, 어떤 분은 3년에 걸쳐서, 그리고 더군다나 팔십 노인 된 할머니께서 하신 걸 보고 정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Q. 소설이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수사 받을 때도 이 대목, 이 대목을 지적해서 5백여 가지를 고발했어요. 당신들이 계속 공산주의 빨갱이들을 편들었다고 하는데 그 분량을 지금부터 따져라. 당신들이 못 따지겠다면 전문적인 평론가를 동원해서 따져라, 페이지 수를 따져봐라. (양쪽에 대한 비판이) 똑같다. 나는 그렇게 공평성을 기했기 때문에 당신도 나를 이성적으로 대해 달라. 말 못해요. 수사기관에서 독자들이 너무 많이 호응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실토를 할 정도였으니까 제가 소설로써 이긴 것이죠.

작가가 꼽은 <태백산맥>의 한 장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 <태백산맥> 10권의 마지막 장면

Q. 소설의 마지막을 <태백산맥>의 한 장면으로 뽑은 이유?

인간의 역사는 소수의 권력자와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거죠.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다 횡포하고 절대 다수를 권력의 힘으로 유린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권력의 생리입니다. 민중만이 핍박받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인간의 정의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저는 그 절대 다수의 민중의 편에 항상 서서 글을 썼고 그들의 힘을 믿으면서 역사의 정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 장면도 하대치와 외서댁이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으로써 새로운 인간다운 이데올로기를 기대해야 된다는 예시를, 상징을 한 것입니다.

Q. 미래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소설은 문자로 만드는 예술이지 않습니까? 감동이 있어야 하고, 소설의 직분은 동시대의 고통과 고난, 괴로움을 승화시켜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는 영구불변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아픔과 괴로움과 통렬함을 문자로 쓴 이유는 그 문자의 생명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도 영원할 테니까, 함께 후대들이 그 시대의 아픔과 모순과 진실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편집: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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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07 21:40:38
    • 수정2021-11-07 2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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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소설가

Q. 소설이 '여순사건'으로 시작하는데?

그 전에는 국가 공식 명칭이 '여순반란사건'이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반란이라는 말이 시대적 역사성도 안 맞고 봉건시대 용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 제주도 4·3 사건을 강제진압해서 '동포를 죽여라' 하는 것에 대한 항거였기 때문에 반란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반란을 빼버리고 '여순 사건' 이라고 썼습니다. 그게 전두환 정권 때였기 때문에 그런 도전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써서, 그 다음부터는 사회학 모든 서적이 '여순사건'이라고 공식 명칭을 바꿨습니다. 지금 모든 매스컴들이 전부 '여순사건'이라고 씁니다. 이런 것이 작가가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조그마한 욕구였고 성취였죠.

Q. 소설의 무대가 벌교인 이유?

벌교라는 드문, 낯선 지명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입니다. 뗏목 다리, 뗏목으로 만든 다리를 벌교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포구로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들고 나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합니다. 여기가 저 조계산 쪽에서부터 와가지고 고흥 쪽으로 넘어가는데 물이 들어와 버리면 사람이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때 뗏목을 엮어서 부교, 물이 들어오면 뜨고 물이 빠지면 내려가는 부교를 설치했던 곳인데, 그래서 벌교란 말이 생긴 것이죠. 뗏목 다리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지명이 벌교고, 그 벌교라고 하는 곳이 갖는 역사성과 사회성 이런 것은 그 다른 곳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갯가를 물고 있는, 바다와 인접해 있는 땅끝 마을이면서 낙안읍성이 생긴 것은 바로 일제시대부터 왜구들이 계속 약탈을 해왔던 곳이고, 그 역사성 속에서 해방이 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싶어했던 민중들의 욕구가 불타올랐던 그런 곳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빨치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산사람(빨치산)이 별 게 아니고 삶 속에서 차별, 경제 불평등, 요즘 말로 하면. 그러니까 산업경제가 없던 농업 농본시대에는 소작과 지주 관계잖아요. 그것이 바뀌어서 산업화되면서 기업과 노동자가 됐듯이 사회구조는 언어(표현)만 달라졌지 똑같이 변화가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불평등, 경제 불평등이잖아요. 부익부 빈익빈 자본주의의 마성이 바로 그거잖아요. 산사람(빨치산)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생활에서 필요한, 도저히 더 이상 개선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는, 삶을 더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동학 때,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도 똑같아요. 다만 이데올로기와 시대가 다를 뿐이다.

Q. 원고지 16,500매에 담고자 했던 것?

제가 태백산맥을 시작할 때 제 키를 넘는 원고량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지 못했죠. <태백산맥>은 가려지고 숨겨지고 파묻혀 있는 역사를 햇볕 아래로 드러낸,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진실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태백산맥>의 높이는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진실의 두께와 비례합니다.

1994년 <태백산맥>과 조정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다.
11년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검찰은, 2005년 '무혐의' 결정을 내린다.

Q.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 11년 만에 무혐의 결정

그 무혐의 처분의 결정서가 이것이고, 저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이 땅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됐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는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백산맥>이 고발되기 전에, 1990년 되기 전에 검찰에서 자체 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렸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그래서 문제 삼지 않기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읽으면 좋으나, 젊은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그건 불온서적으로 취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안방에서 읽으면 교양물이 되고, 대학생 아들이 건넛방에서 읽으면 불온서적이 된다는 말이냐? 하고 야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Q. 평범한 독자들이 손으로 옮겨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이 자기들이 솔선해서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한 것입니다. 저는 태백산맥문학관 중에서 여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저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썼지만, 독자들이 어떻게 이 많은 양을 이렇게 엄청나게 쓸 수 있었는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마흔아홉 명이고 지금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증축을 하도록 지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저한테 얘기해주는데, 그 사람이 전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의 문학관을 다 봤는데 이렇게 빅토르 위고나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나 괴테나 그런 사람들 문학관에도, 독자들이 그의 대표작을 이렇게 필사한 일이 한 번도 없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일이고 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글 쓰는 보람을 한없이 느끼고 끝없이 행복합니다. 감탄과 경탄과 고마움과 말로 헤아릴 수가 없었죠. 한 번 읽기도 어려운데 이것을 몇 개월에, 어떤 분은 3년에 걸쳐서, 그리고 더군다나 팔십 노인 된 할머니께서 하신 걸 보고 정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Q. 소설이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수사 받을 때도 이 대목, 이 대목을 지적해서 5백여 가지를 고발했어요. 당신들이 계속 공산주의 빨갱이들을 편들었다고 하는데 그 분량을 지금부터 따져라. 당신들이 못 따지겠다면 전문적인 평론가를 동원해서 따져라, 페이지 수를 따져봐라. (양쪽에 대한 비판이) 똑같다. 나는 그렇게 공평성을 기했기 때문에 당신도 나를 이성적으로 대해 달라. 말 못해요. 수사기관에서 독자들이 너무 많이 호응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실토를 할 정도였으니까 제가 소설로써 이긴 것이죠.

작가가 꼽은 <태백산맥>의 한 장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 <태백산맥> 10권의 마지막 장면

Q. 소설의 마지막을 <태백산맥>의 한 장면으로 뽑은 이유?

인간의 역사는 소수의 권력자와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거죠.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다 횡포하고 절대 다수를 권력의 힘으로 유린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권력의 생리입니다. 민중만이 핍박받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인간의 정의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저는 그 절대 다수의 민중의 편에 항상 서서 글을 썼고 그들의 힘을 믿으면서 역사의 정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 장면도 하대치와 외서댁이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으로써 새로운 인간다운 이데올로기를 기대해야 된다는 예시를, 상징을 한 것입니다.

Q. 미래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소설은 문자로 만드는 예술이지 않습니까? 감동이 있어야 하고, 소설의 직분은 동시대의 고통과 고난, 괴로움을 승화시켜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는 영구불변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아픔과 괴로움과 통렬함을 문자로 쓴 이유는 그 문자의 생명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도 영원할 테니까, 함께 후대들이 그 시대의 아픔과 모순과 진실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편집: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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