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순정한 분노로 지켜내는 아날로그의 세계 - 김금희 ‘경애의 마음’
입력 2021.06.27 (21:30)
수정 2021.06.2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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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문학평론가
순정한 분노로 지켜내는 아날로그의 세계-김금희 『경애의 마음』
이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반도미싱의 샐러리맨 ‘공상수’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과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가득 차 있어 누구 하나 곁에 태울 여력이 없는 상수의 차량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 소설은 오랜 기다림 끝에 경애가 상수의 집에 찾아오며 마무리된다. 표면적으로는 단 한 사람의 등장일 뿐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경애의 실루엣이 주는 감동은 단순하지 않다. 베트남이라는 장소를 경유하며 붕괴되었던 상수의 정체성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가 아버지의 세계와 결별하며 열어낸 ‘다시 만난 세계’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자아 뒤에 숨은 채 자신을 방기해오던 상수는 이제 회사의 부적절한 관행이나 부당한 사건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맞서는 투쟁의 피로를 기꺼이 선택한다. 그렇게 상수가 열어내는 “측량되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에 열을 올리고 헛수고가 분명할 일에 봉사하는 백일몽”(350쪽)의 세계란 한껏 ‘유도리’를 발휘하는 가운데 부정한 수익과 리베이트가 얽혀 들어가는 자본의 세계, 즉 아버지의 세계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물론 공상수가 지향하는 세계는 소설의 서두부터 명확히 자리하고 있다. 미싱 기계를 영업하지만 그의 차에 실려 있는 것이 ‘실’인 것처럼, 그는 효율이나 성능과 거리를 두기에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는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품고 다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효용가치를 따지는 계산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영역에 남아있기에 “삶에 있어 숨구멍”(9쪽)이 되어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두에서 상수의 아날로그적 지향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공간은 그가 남몰래 운영하는 연애 상담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뿐이다. 오프라인에서 상수의 고군분투는 융통성 없는 불화로 삐걱대지만, 온라인에서 그는 “줄리아 로버츠가 가진 로맨스의 어떤 개척정신”(34쪽)을 발휘하며 사랑으로 상심한 여자들의 오늘을 죄가 없는 것으로 구원해낸다. 그러니 공상수는 일찌감치 사랑을 수호하는 ‘언니’였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의 남성성은 이런 언니의 세계가 펼쳐지기 어렵게 만든다. 상수가 재수 시절 겪은 에피소드는 한국 사회에서 가학적 남성성이 창출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상수는 재수학원에서 군대 훈련소처럼 일상의 규율을 정하고 통제하는 생활조교라는 존재를 통해 이상한 감정을 경험한다. 조교가 온갖 얼차려로 신체를 조련하는 동안, 상수 안의 분노와 원망과 울분은 권력의 낙차 속에서 용서와 동정과 연민으로 변해간다. 상수는 이 고통스럽고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조교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렴풋이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학원과의 계약이 끝난 조교가 떠나가는 순간 분명해지는 것은 상수의 감정이 그저 권력의 낙차를 통해 생성된 피가학의 열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 가학적인 남성성은 국회의원까지 지낸 정치인 아버지가 무섭게 화를 내며 상수에게 내던진 농구공에도, 형 상규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휘두르는 폭력에도 스며들어있다. 그러나 상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어머니가 가장 환하던 시절에 봄볕을 맞으며 불러주었던 노래를 귀중한 유산처럼 기억한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332쪽)
비록 온라인에서지만 상수의 ‘언니됨’은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폭력성이 가열차게 얽혀드는 아버지의 세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상처받은 채 삿뽀로에서 희미하게 자리하다 소멸한 어머니의 세계를 물려받았다는 증표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상수가 경유하는 공간이 아버지가 늘 관성적으로 가길 권유하던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이라는 사실은 필수불가결해 보인다. 미국이 어떤 죄책감 없이 상승에의 열망에 몸을 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베트남은 욕망 이면의 어둡고 더러운 자리들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물론 서사에서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유용할 미싱 기계의 판매처로서 개연성을 지니지만, 이곳은 독자들에게 한국인들이 선량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 더 많이 서있는 베트남 전쟁을 상기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한민족의 레드 콤플렉스가 막대한 경제적 수혜로 돌아온 박정희 정부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 가해성과 착취가 그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는 듯이,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베트남행에서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 대한 시혜적 태도와 인종적 멸시, 파견 사원들이 융통성을 발휘해 부정한 수익을 올리고 다시 유흥비로 돌아가는 정황은 적나라하다.
이 소설에서 베트남은 결코 낭만적인 이국이 아니라, 자본의 속도 아래 한국의 부정적인 관행과 착취가 고스란히 옮겨진 채 더 큰 불안과 파괴의 정동을 낳는 음화(陰畫)의 장소다. 베트남에서 상수는 “영업 참 전두환처럼 한다”(193쪽)는 게 칭찬이 되고 “칠팔십년대에 각성제 먹어가며 일했던”(217쪽) 기억을 들먹이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영업을 내세우는 일그러진 남성성을 마주하지만, 그의 곁에는 ‘경애’와 ‘조선생’이 있다.
베트남으로 떠나던 시점에서 두 사람은 무너져있다. 경애는 육년 간의 연애가 선배의 배신으로 끝났으면서도, 이 사랑을 놓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한때 지하 공장에서 미싱이 돌아가는 기척을 들으며, 옷을 입는다는 건 어딜 나가고 누굴 만나는 인간의 생활이 담겨있는 것이니 “인간다워지라고 미싱을 돌린다고 생각”(84쪽)하라고 말했던 기술자 조선생은 이제 알코올중독으로 손을 떤다. 그러나 상수는 나약함과 패기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 특유의 윤리로 조선생의 재취업을 도와 함께 베트남에 오고, 경애와 조선생이 베트남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대하며 어울리는 동안 이 두 삶의 내면 역시 조용히 치유되어 간다.
베트남에서 상수에게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언니는 죄가 없다>의 홈페이지 계정이 해킹되는 일이다. 홈페이지가 해킹되면서 “예쁜 언니들의 집합소”(227쪽)라는 성인광고 창이 뜨는 이메일로 변하는 순간, 위로와 연대의 장을 만들어온 강인한 ‘언니들’은 너무 손쉽게 성적으로 소비되는 ‘언니들’이 된다. 언니를 자임해온 정체성이 들통날 위기에 빠진 상수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그를 위로해주고 헤쳐갈 태도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경애다.
과거에 회사에서 벌어진 농성에 참여했다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을 항의하면서 파업을 무산시켰다는 오명을 쓴 바 있던 경애는, 서로를 돌볼 줄 아는 ‘강인한 여성성’과 외부의 폭력에 곧잘 손상되는 ‘취약한 여성성’이 교차하는 자리에 이미 오래 서있던 사람인 것이다. 농성에 참여하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애는 베트남에서 타사의 미싱을 부정 공급해왔던 오과장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 비판의 대가로 받은 부당 발령 앞에서 경애는 기꺼이 홀로 투쟁하길 선택함으로써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307쪽)임을 상수에게 전달한다. 이는 편안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일상을 영악하게 지키려는 경애의 과거 애인 ‘산주’의 속물성이나, 홀로 피켓을 든 경애를 고역으로 여기며 외면하며 지나가는 지인들의 나약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경애의 마음』은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상수가 해준 이 말로 인해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경애의 마음은 세상의 부정에 맞대면하는 ‘순정한 분노’로 일어난다. 이 마음을 이어받아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 해킹 사건 뒤에서 잠적하는 대신, 용기 있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서서히 복구해간다. 이 연결들 속에서 드러나는 ‘경애의 마음’이란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부정한 일에 기꺼이 맞서는 용기다. 그 의지와 용기에는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에 연루된 은총(E)의 죽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지 않으려는 애도가 스며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경애의 마음’은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편견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을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세상이나, 고작 술값을 걱정해 아이들의 생명을 불길에 던져넣었던 호프집 사장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선연한 결의이기도 하다. 무슨 이유로도 인간을 둘러싼 슬픔을 하찮게 만들지 않겠다는 결연함은 이 시대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위안이 아닐까. 인간의 계산되지 않는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가장 앞에 두는 아날로그의 세계, 그 세계를 순정한 분노로 호위하는 김금희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문학은 조금 더 다정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바로 선다.
강지희 문학평론가·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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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순정한 분노로 지켜내는 아날로그의 세계 - 김금희 ‘경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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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6-27 21:30:19
- 수정2021-06-27 21:31:35
순정한 분노로 지켜내는 아날로그의 세계
-김금희 『경애의 마음』
이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반도미싱의 샐러리맨 ‘공상수’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과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가득 차 있어 누구 하나 곁에 태울 여력이 없는 상수의 차량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 소설은 오랜 기다림 끝에 경애가 상수의 집에 찾아오며 마무리된다. 표면적으로는 단 한 사람의 등장일 뿐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경애의 실루엣이 주는 감동은 단순하지 않다. 베트남이라는 장소를 경유하며 붕괴되었던 상수의 정체성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가 아버지의 세계와 결별하며 열어낸 ‘다시 만난 세계’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자아 뒤에 숨은 채 자신을 방기해오던 상수는 이제 회사의 부적절한 관행이나 부당한 사건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맞서는 투쟁의 피로를 기꺼이 선택한다. 그렇게 상수가 열어내는 “측량되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에 열을 올리고 헛수고가 분명할 일에 봉사하는 백일몽”(350쪽)의 세계란 한껏 ‘유도리’를 발휘하는 가운데 부정한 수익과 리베이트가 얽혀 들어가는 자본의 세계, 즉 아버지의 세계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물론 공상수가 지향하는 세계는 소설의 서두부터 명확히 자리하고 있다. 미싱 기계를 영업하지만 그의 차에 실려 있는 것이 ‘실’인 것처럼, 그는 효율이나 성능과 거리를 두기에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는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품고 다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효용가치를 따지는 계산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영역에 남아있기에 “삶에 있어 숨구멍”(9쪽)이 되어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두에서 상수의 아날로그적 지향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공간은 그가 남몰래 운영하는 연애 상담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뿐이다. 오프라인에서 상수의 고군분투는 융통성 없는 불화로 삐걱대지만, 온라인에서 그는 “줄리아 로버츠가 가진 로맨스의 어떤 개척정신”(34쪽)을 발휘하며 사랑으로 상심한 여자들의 오늘을 죄가 없는 것으로 구원해낸다. 그러니 공상수는 일찌감치 사랑을 수호하는 ‘언니’였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의 남성성은 이런 언니의 세계가 펼쳐지기 어렵게 만든다. 상수가 재수 시절 겪은 에피소드는 한국 사회에서 가학적 남성성이 창출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상수는 재수학원에서 군대 훈련소처럼 일상의 규율을 정하고 통제하는 생활조교라는 존재를 통해 이상한 감정을 경험한다. 조교가 온갖 얼차려로 신체를 조련하는 동안, 상수 안의 분노와 원망과 울분은 권력의 낙차 속에서 용서와 동정과 연민으로 변해간다. 상수는 이 고통스럽고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조교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렴풋이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학원과의 계약이 끝난 조교가 떠나가는 순간 분명해지는 것은 상수의 감정이 그저 권력의 낙차를 통해 생성된 피가학의 열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 가학적인 남성성은 국회의원까지 지낸 정치인 아버지가 무섭게 화를 내며 상수에게 내던진 농구공에도, 형 상규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휘두르는 폭력에도 스며들어있다. 그러나 상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어머니가 가장 환하던 시절에 봄볕을 맞으며 불러주었던 노래를 귀중한 유산처럼 기억한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332쪽)
비록 온라인에서지만 상수의 ‘언니됨’은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폭력성이 가열차게 얽혀드는 아버지의 세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상처받은 채 삿뽀로에서 희미하게 자리하다 소멸한 어머니의 세계를 물려받았다는 증표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상수가 경유하는 공간이 아버지가 늘 관성적으로 가길 권유하던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이라는 사실은 필수불가결해 보인다. 미국이 어떤 죄책감 없이 상승에의 열망에 몸을 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베트남은 욕망 이면의 어둡고 더러운 자리들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물론 서사에서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유용할 미싱 기계의 판매처로서 개연성을 지니지만, 이곳은 독자들에게 한국인들이 선량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 더 많이 서있는 베트남 전쟁을 상기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한민족의 레드 콤플렉스가 막대한 경제적 수혜로 돌아온 박정희 정부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 가해성과 착취가 그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는 듯이,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베트남행에서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 대한 시혜적 태도와 인종적 멸시, 파견 사원들이 융통성을 발휘해 부정한 수익을 올리고 다시 유흥비로 돌아가는 정황은 적나라하다.
이 소설에서 베트남은 결코 낭만적인 이국이 아니라, 자본의 속도 아래 한국의 부정적인 관행과 착취가 고스란히 옮겨진 채 더 큰 불안과 파괴의 정동을 낳는 음화(陰畫)의 장소다. 베트남에서 상수는 “영업 참 전두환처럼 한다”(193쪽)는 게 칭찬이 되고 “칠팔십년대에 각성제 먹어가며 일했던”(217쪽) 기억을 들먹이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영업을 내세우는 일그러진 남성성을 마주하지만, 그의 곁에는 ‘경애’와 ‘조선생’이 있다.
베트남으로 떠나던 시점에서 두 사람은 무너져있다. 경애는 육년 간의 연애가 선배의 배신으로 끝났으면서도, 이 사랑을 놓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한때 지하 공장에서 미싱이 돌아가는 기척을 들으며, 옷을 입는다는 건 어딜 나가고 누굴 만나는 인간의 생활이 담겨있는 것이니 “인간다워지라고 미싱을 돌린다고 생각”(84쪽)하라고 말했던 기술자 조선생은 이제 알코올중독으로 손을 떤다. 그러나 상수는 나약함과 패기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 특유의 윤리로 조선생의 재취업을 도와 함께 베트남에 오고, 경애와 조선생이 베트남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대하며 어울리는 동안 이 두 삶의 내면 역시 조용히 치유되어 간다.
베트남에서 상수에게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언니는 죄가 없다>의 홈페이지 계정이 해킹되는 일이다. 홈페이지가 해킹되면서 “예쁜 언니들의 집합소”(227쪽)라는 성인광고 창이 뜨는 이메일로 변하는 순간, 위로와 연대의 장을 만들어온 강인한 ‘언니들’은 너무 손쉽게 성적으로 소비되는 ‘언니들’이 된다. 언니를 자임해온 정체성이 들통날 위기에 빠진 상수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그를 위로해주고 헤쳐갈 태도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경애다.
과거에 회사에서 벌어진 농성에 참여했다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을 항의하면서 파업을 무산시켰다는 오명을 쓴 바 있던 경애는, 서로를 돌볼 줄 아는 ‘강인한 여성성’과 외부의 폭력에 곧잘 손상되는 ‘취약한 여성성’이 교차하는 자리에 이미 오래 서있던 사람인 것이다. 농성에 참여하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애는 베트남에서 타사의 미싱을 부정 공급해왔던 오과장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 비판의 대가로 받은 부당 발령 앞에서 경애는 기꺼이 홀로 투쟁하길 선택함으로써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307쪽)임을 상수에게 전달한다. 이는 편안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일상을 영악하게 지키려는 경애의 과거 애인 ‘산주’의 속물성이나, 홀로 피켓을 든 경애를 고역으로 여기며 외면하며 지나가는 지인들의 나약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경애의 마음』은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상수가 해준 이 말로 인해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경애의 마음은 세상의 부정에 맞대면하는 ‘순정한 분노’로 일어난다. 이 마음을 이어받아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 해킹 사건 뒤에서 잠적하는 대신, 용기 있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서서히 복구해간다. 이 연결들 속에서 드러나는 ‘경애의 마음’이란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부정한 일에 기꺼이 맞서는 용기다. 그 의지와 용기에는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에 연루된 은총(E)의 죽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지 않으려는 애도가 스며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경애의 마음’은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편견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을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세상이나, 고작 술값을 걱정해 아이들의 생명을 불길에 던져넣었던 호프집 사장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선연한 결의이기도 하다. 무슨 이유로도 인간을 둘러싼 슬픔을 하찮게 만들지 않겠다는 결연함은 이 시대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위안이 아닐까. 인간의 계산되지 않는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가장 앞에 두는 아날로그의 세계, 그 세계를 순정한 분노로 호위하는 김금희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문학은 조금 더 다정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바로 선다.
강지희 문학평론가·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김금희 『경애의 마음』
이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반도미싱의 샐러리맨 ‘공상수’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과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가득 차 있어 누구 하나 곁에 태울 여력이 없는 상수의 차량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 소설은 오랜 기다림 끝에 경애가 상수의 집에 찾아오며 마무리된다. 표면적으로는 단 한 사람의 등장일 뿐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경애의 실루엣이 주는 감동은 단순하지 않다. 베트남이라는 장소를 경유하며 붕괴되었던 상수의 정체성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가 아버지의 세계와 결별하며 열어낸 ‘다시 만난 세계’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자아 뒤에 숨은 채 자신을 방기해오던 상수는 이제 회사의 부적절한 관행이나 부당한 사건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맞서는 투쟁의 피로를 기꺼이 선택한다. 그렇게 상수가 열어내는 “측량되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에 열을 올리고 헛수고가 분명할 일에 봉사하는 백일몽”(350쪽)의 세계란 한껏 ‘유도리’를 발휘하는 가운데 부정한 수익과 리베이트가 얽혀 들어가는 자본의 세계, 즉 아버지의 세계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물론 공상수가 지향하는 세계는 소설의 서두부터 명확히 자리하고 있다. 미싱 기계를 영업하지만 그의 차에 실려 있는 것이 ‘실’인 것처럼, 그는 효율이나 성능과 거리를 두기에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는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품고 다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효용가치를 따지는 계산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영역에 남아있기에 “삶에 있어 숨구멍”(9쪽)이 되어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두에서 상수의 아날로그적 지향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공간은 그가 남몰래 운영하는 연애 상담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뿐이다. 오프라인에서 상수의 고군분투는 융통성 없는 불화로 삐걱대지만, 온라인에서 그는 “줄리아 로버츠가 가진 로맨스의 어떤 개척정신”(34쪽)을 발휘하며 사랑으로 상심한 여자들의 오늘을 죄가 없는 것으로 구원해낸다. 그러니 공상수는 일찌감치 사랑을 수호하는 ‘언니’였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의 남성성은 이런 언니의 세계가 펼쳐지기 어렵게 만든다. 상수가 재수 시절 겪은 에피소드는 한국 사회에서 가학적 남성성이 창출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상수는 재수학원에서 군대 훈련소처럼 일상의 규율을 정하고 통제하는 생활조교라는 존재를 통해 이상한 감정을 경험한다. 조교가 온갖 얼차려로 신체를 조련하는 동안, 상수 안의 분노와 원망과 울분은 권력의 낙차 속에서 용서와 동정과 연민으로 변해간다. 상수는 이 고통스럽고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조교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렴풋이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학원과의 계약이 끝난 조교가 떠나가는 순간 분명해지는 것은 상수의 감정이 그저 권력의 낙차를 통해 생성된 피가학의 열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 가학적인 남성성은 국회의원까지 지낸 정치인 아버지가 무섭게 화를 내며 상수에게 내던진 농구공에도, 형 상규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휘두르는 폭력에도 스며들어있다. 그러나 상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어머니가 가장 환하던 시절에 봄볕을 맞으며 불러주었던 노래를 귀중한 유산처럼 기억한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332쪽)
비록 온라인에서지만 상수의 ‘언니됨’은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폭력성이 가열차게 얽혀드는 아버지의 세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상처받은 채 삿뽀로에서 희미하게 자리하다 소멸한 어머니의 세계를 물려받았다는 증표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상수가 경유하는 공간이 아버지가 늘 관성적으로 가길 권유하던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이라는 사실은 필수불가결해 보인다. 미국이 어떤 죄책감 없이 상승에의 열망에 몸을 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베트남은 욕망 이면의 어둡고 더러운 자리들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물론 서사에서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유용할 미싱 기계의 판매처로서 개연성을 지니지만, 이곳은 독자들에게 한국인들이 선량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 더 많이 서있는 베트남 전쟁을 상기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한민족의 레드 콤플렉스가 막대한 경제적 수혜로 돌아온 박정희 정부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 가해성과 착취가 그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는 듯이,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베트남행에서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 대한 시혜적 태도와 인종적 멸시, 파견 사원들이 융통성을 발휘해 부정한 수익을 올리고 다시 유흥비로 돌아가는 정황은 적나라하다.
이 소설에서 베트남은 결코 낭만적인 이국이 아니라, 자본의 속도 아래 한국의 부정적인 관행과 착취가 고스란히 옮겨진 채 더 큰 불안과 파괴의 정동을 낳는 음화(陰畫)의 장소다. 베트남에서 상수는 “영업 참 전두환처럼 한다”(193쪽)는 게 칭찬이 되고 “칠팔십년대에 각성제 먹어가며 일했던”(217쪽) 기억을 들먹이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영업을 내세우는 일그러진 남성성을 마주하지만, 그의 곁에는 ‘경애’와 ‘조선생’이 있다.
베트남으로 떠나던 시점에서 두 사람은 무너져있다. 경애는 육년 간의 연애가 선배의 배신으로 끝났으면서도, 이 사랑을 놓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한때 지하 공장에서 미싱이 돌아가는 기척을 들으며, 옷을 입는다는 건 어딜 나가고 누굴 만나는 인간의 생활이 담겨있는 것이니 “인간다워지라고 미싱을 돌린다고 생각”(84쪽)하라고 말했던 기술자 조선생은 이제 알코올중독으로 손을 떤다. 그러나 상수는 나약함과 패기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 특유의 윤리로 조선생의 재취업을 도와 함께 베트남에 오고, 경애와 조선생이 베트남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대하며 어울리는 동안 이 두 삶의 내면 역시 조용히 치유되어 간다.
베트남에서 상수에게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언니는 죄가 없다>의 홈페이지 계정이 해킹되는 일이다. 홈페이지가 해킹되면서 “예쁜 언니들의 집합소”(227쪽)라는 성인광고 창이 뜨는 이메일로 변하는 순간, 위로와 연대의 장을 만들어온 강인한 ‘언니들’은 너무 손쉽게 성적으로 소비되는 ‘언니들’이 된다. 언니를 자임해온 정체성이 들통날 위기에 빠진 상수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그를 위로해주고 헤쳐갈 태도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경애다.
과거에 회사에서 벌어진 농성에 참여했다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성희롱을 항의하면서 파업을 무산시켰다는 오명을 쓴 바 있던 경애는, 서로를 돌볼 줄 아는 ‘강인한 여성성’과 외부의 폭력에 곧잘 손상되는 ‘취약한 여성성’이 교차하는 자리에 이미 오래 서있던 사람인 것이다. 농성에 참여하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애는 베트남에서 타사의 미싱을 부정 공급해왔던 오과장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 비판의 대가로 받은 부당 발령 앞에서 경애는 기꺼이 홀로 투쟁하길 선택함으로써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307쪽)임을 상수에게 전달한다. 이는 편안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일상을 영악하게 지키려는 경애의 과거 애인 ‘산주’의 속물성이나, 홀로 피켓을 든 경애를 고역으로 여기며 외면하며 지나가는 지인들의 나약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경애의 마음』은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상수가 해준 이 말로 인해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경애의 마음은 세상의 부정에 맞대면하는 ‘순정한 분노’로 일어난다. 이 마음을 이어받아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 해킹 사건 뒤에서 잠적하는 대신, 용기 있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서서히 복구해간다. 이 연결들 속에서 드러나는 ‘경애의 마음’이란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부정한 일에 기꺼이 맞서는 용기다. 그 의지와 용기에는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에 연루된 은총(E)의 죽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지 않으려는 애도가 스며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경애의 마음’은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편견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을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세상이나, 고작 술값을 걱정해 아이들의 생명을 불길에 던져넣었던 호프집 사장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선연한 결의이기도 하다. 무슨 이유로도 인간을 둘러싼 슬픔을 하찮게 만들지 않겠다는 결연함은 이 시대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위안이 아닐까. 인간의 계산되지 않는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가장 앞에 두는 아날로그의 세계, 그 세계를 순정한 분노로 호위하는 김금희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문학은 조금 더 다정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바로 선다.
강지희 문학평론가·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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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기자 3rdlin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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